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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당시 영국 간호원 나이팅게일[Crimean War during English nursing reformer Florence Nightingale]

슈트름게슈쯔 2013. 8. 30. 14:48

 

 

크림전쟁 당시 종군 식량 상인 여성

 

 

 

샤드포스 대령의 영국군 57연대 병사들

 

 

 

크림전쟁 당시 세바스토폴의 영국군과 프랑스군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투입된 영국군 박격포 포병대 병사들

 

 

 

영국군 G. 브라운 장군과 영국군 장교 - 1855년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의 본부가 된 우크라이나의 바라클라바 항구와 영국 해군의 선박들 - 1855년

 

 

크림 전쟁은 1853년 부터 1856년 2월 까지 근 4년간 지속되었던 연합국과 러시아 제국의 전쟁이었다.

연합국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및 사르디니아왕국,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참가하였다.

전쟁의 발단은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트르크 제국내의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둘러싼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권한 다툼을 배경으로

프랑스와 영국이 참전하는 등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이권 다툼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사르디니아 왕국은 크림 반도에 아무런 이권이 없고, 러시아 제국과  특별히 대립 관계도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을 계산으로 참전했다.

사실상 크림 전쟁에서도 제1차 러투전쟁과 제2차 러투전쟁처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실제로 러투 전쟁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해군, 육군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하지만, 크림 전쟁에서는 연합국의 지원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유일하게 러시아 제국에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의 대부분은 흑해에 위치한 크림 반도에서 일어났으며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파리 조약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은 다뉴브 강의 하구지역및 흑해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이후 흑해는 모든 국가에 대해 군함 통과 및 무장이 제한되며 중립이 선언된다.

또한 영국, 프랑스 등은 근동 지역의 안전을 위하여

당시 태동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당시 전쟁터의 부상병들을 돌보는 종군 간호사들로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영국 성공회 수녀  간호사들이 활약을 했다.

그 결과 군인들이 이전보다 개선된 의료 서비스를 받게 되어

군인들이 병이나 부상으로 죽는 비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알마 강점투및 발라클라바 전투와 인케르만 전투와 세바스토폴 포위전등 

크림 전쟁에서 벌어진 4번의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였다.

 

 

 

 

크리미아 카스카트 언덕의 아일랜드 빅토리아 여왕 89보병 연대 병사들

 

 

 

프랑스군 사령관 피에르 보스켓(Pierre Bosquet : 1810 ~1861)

 

 

 

크림전쟁 당시 영국 제 8 경기병 부대의 배식을 준비하는 취사병

 

 

 

 

대구경 대포에 바리케이트를 씌어 방어를 강화한 세바스토폴 러시아군 요새의 내부

 

그러나 세바스토폴 요새의 러시아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공격에 끝내 패배한다.

 

 

 

크림전쟁 당시의 영국 종군 사진사 로저 펜튼(Roger Fenton :1819 – 1869)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 병사들

 

 

 

영국군 브라운 대장과 로우 대령과 조지 대장

 

 

 

크림전쟁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오마르 파샤와 영국군의 펠리시어 장군의 회담

 

 

 

크림전쟁 당시 영국의 종군 사진사 로저 펜튼의 이동식 사진 제작용 암실

 

 

 

크림전쟁 당시 영국 더 타임즈(The Times)지의 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William Howard Russell : 1820~1907)

 

 

 

러시아 전선 캠프에서 술을 부어주는 할리웰 대령 - 1855년

 

 

 

겨울외투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제4 기병대 브라운 대장

 

 

 

영국군 제4 기병대의 막사 -1855년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 제 4기병대 병사들

 

 

 

크림전쟁 당시의 어느 병사와 대포에 앉은 2명의 여성 - 1855년

 

 

 

세바스토폴 전투에 사용할 대포를 나르는 영국군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의 박격포대 - 1855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12일 ~1910년 8월 13일)

 

 

 

 나이팅게일(1820년 5월12일 ~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이며 작가겸 통계학자였다.

영국 성공회의  성인이기도 하며,성공회에서는 해마다 8월 13일을  나이팅게일의 축일로 지키고 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부유한 중산계급의 딸로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에서 여행 중이던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과 프랜시스 나이팅게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어식 지명이다.

플로렌스의 위에 언니 파시노프가 있었는데, 이 이름도 나폴리(파시노프의 출생지)의 그리스 식 지명이다.

플로렌스는 잉굴랜드 햄프셔주의 엠블리와 더비셔 주의 리 허스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영어,프랑스어,라틴어,지리학등의  다양한 학문을  어릴 때부터 공부하였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 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신교 목사가 운영하는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이듬해 크림전쟁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흔히 나이팅게일 하면 고통 받는 부상병들을 돌본 봉사자를 연상하지만

 이 시기의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

그녀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의 관리들을 설득했고,병원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행정가임을 말해준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 (현: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 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미국 남북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의 보불전쟁때에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로 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았다.

나이팅게일의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photo from : vint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