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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과 의지의 승리[Leni Riefenstahl & Triumph des Willens]

슈트름게슈쯔 2013. 7. 28. 20:06

 

 

 

 

 

 

레니 리펜슈탈의 강인한 여체

 

 

 

 

 

 

 

 

 

 

 

 

마를레느 디트리히와 레니 리펜슈탈

 

 

 

 

 

 

 

아돌프 히틀러와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 1902~2003)

 

 

 

 

 

레니 리펜슈탈(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은

 독일의 무용가및 배우 겸 감독및 영화제작자및 사진작가였다.

그녀는 촬영 기술에서 혁신을 일으키는 등 영화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2차 대전 이후에는 영화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3년, 표현무용의 무용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무용가로서 [몸]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구했고, 특히나 [강인한 육체]에 집중했다.

이런 그녀의 성향에 대해서 어떤이는 [타고난 파시즘의 징조]라고 평했다.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공연하던 중 프라하 공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그녀는

 결국 무용가로서의 길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된 산악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가진 그녀는 무릎수술을 받은 후,

아르놀트 팡크 감독과 함께 산악영화 제작에 뛰어든다.

빼어난 미모와 강인한 육체를 지닌 그녀는 산악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스타 영화배우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32년,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자신이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영화 [푸른 빛]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그녀는 이제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녀의 영화를 보고 팬이 된 한 남자와의 만남이

 그녀의 인생에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 남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녀의 영화 [푸른 빛]을 보고 그녀의 열성적인 팬이 된 히틀러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었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그녀는 뛰어난 재능을 나치즘을 선전하는데 쓰고 만다.

1935년, 그녀는 히틀러의 요청으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의지의 승리를 만들게 된다.

 의지의 승리는 당시로선 찾아보기 어려운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카메라 구도,

 효율적인 음악 사용 등으로 히틀러를 최고의 영웅으로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의지의 승리"에 크게 기뻐한 히틀러는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영상은 오로지 "의지의 승리"로 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이듬해 그녀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만들게 된다.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하에 최첨단 영화기자재들을 맘껏 구사하였고,

리펜슈탈 자신의 재능도 최고로 끌어낸 걸작 영화였다.

다만 문제는 나치즘의 아리안 우월주의를 찬양하는데 이 모든게 이용되었다는 것이었지만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독창적인 영상미학을 선보인 그녀는 영화사에 이 영화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된다.
올림피아에서 그녀가 가장 주목했던 선수는 바로 대한민국의 손기정 선수였다고 한다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반한 그녀는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의 영상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올림피아]로 그녀는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혹독한 책임을 져야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영화미학만을 생각했다"라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호했다.

이런 그녀의 일관된 고집스러운 태도가 나치즘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악랄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전범재판에서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사실상 그녀는 독일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하게 된다.

전쟁전부터 기획했던 영화 [저지]를 1953년 개봉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나치즘을 찬양한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남은 생애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온갖 비판과 중상모략에 법정다툼으로 일생을 보냈고,

 악평을 받는 그녀와의 영화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스탭들도 없어서

그녀는 결국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작가의 길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1962년부터 아프리카의 누바족을 만나 10년에 걸쳐 그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았고

 1973년, 10개국에서 사진집 [누바]를 출판하여 아티스트로서 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집 [누바]에서도 촬영기법이 나치즘을 찬양한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와 유사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73세의 나이에 나이를 속이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다속을 촬영한 사진집을 내놓기도 할만큼 늙어서도 도전 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무려 100세의 나이에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여

[원더 언더 워터 원색의 바다]라는 영화를 오랫만에 제작했다.

이것은 그녀의 최후의 영화가 되었고,

역대 최고령 스쿠버 다이버의 기록도 세웠다.

이듬해 2003년, 그녀는 잠자듯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일생은 도전의 일생이라 할 만한데 무용가로 시작해서 배우로, 영화감독으로,

 노년에는 스쿠버 다이빙까지 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영화사에 길이남을 새로운 시도를 한 뛰어난 재능의 감독이란 평가와

나치즘을 선전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치관이나 나치즘 선전 영화를 찍은 행적들을 떠나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망하기 직전에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카이저라이히(대전의 유산)에서는 '우리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투쟁을 영화화한다.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는 레니 리펜슈탈이 제작한 선전 영화이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1934년 나치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며,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전 영화이다.

선전영화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다큐멘터리이지만,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며 선진적인 촬영기법을 도입했다.

히틀러가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히틀러가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강림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서 전당대회에 참여한 군중들의 질서정연한 행진, 히틀러의 연설 내용 등을 웅장하게 묘사한다.

이 영화는 훗날 만들어진 모든 선전 영화의 모범이 되었으며,

몇몇 장면은 선전 영화 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빌려 쓰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스타워즈 에피소드4 - 새로운 희망] 끝 부분에서 한 솔로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레이아 공주로부터 훈장을 받는 장면은

영화 [의지의 승리]와 시각적으로 유사하며 같은 배경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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