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괴인열전

소련군 반격 작전의 주도자 추이코프 중장[Soviet Army make a counterattack Hero Vasily Chuikov a lieutenant general]

슈트름게슈쯔 2013. 7. 31. 17:21

 

바실리 추이코프 (Vasily Ivanovich Chuikov : 1900 ~1982)

 

강인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그는 독소전쟁 당시 

독일 군대를 마치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몰아 붙였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한 소련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1900년 모스크바 남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8세가 되던 1918년 4월 붉은 군대에 입대를 했다.

 1918-1920년에는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제5군의 일원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여기서 맹활약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는 등 군공을 쌓으면서 스무 살의 나이로 연대장까지 승진했다.

1921~25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장교 교육을 받았고 1936년에는 기계화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기계화 여단장으로 승진했고, 제4군 사령관에 부임해 2차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에 참전했다.

1940년부터 1942년 3월까지는 중국에 파견되어 장제스의 군사고문을 맡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그는 중국에 있었지만 본국에서 호출 명령을 받은 이후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1942년 5월부터 제1예비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제64군으로 개칭되어 투입되었는데,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에레멘코는 8월에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수비하게 된

 제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너무 패배주의적이라고서 해임 시키고 그 자리에 추이코프를 앉히게 된다.

추이코프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의 화력과 공중 지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포병의  지원 하에 독일군에 바싹 붙어 공격하는 근접 전술을 펼쳤다. 

그러했던 추이코프의  전술은 좁은 구역에서 진행되는 시가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고,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를 탈취하기 위하여 광적인 집착을 보인 히틀러는

퇴각은 생각치도 않고 오로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예비 부대를 쏟아붓는 무리한 짓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도 추이코프는 시내에서 결사적으로 방어전을 벌였지만,

11월 초에는 거의 볼가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추이코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독일군을 집요하게 괴롭힌 전투에 의해

독일 제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소련군 스나이퍼 바실리 자이체프의 총을 만져보는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작전을 구상 중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과 추이코프, 니콜라이 크릴로프 참모장.

 당시 추이코프는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시키기전 소련군 39연대 병사들에게 훈시를 하는 바실리 추이코프 - 1942년

 

 

  추이코프가 독일군의 주의를 끌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은밀하게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총공격을 퍼부었고,

  시내에 못박힌 독일 제6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추이코프는 상장(한국식 : 중장)으로 진급했고,

 제8친위군으로 개편된 62군을 종전 때까지 계속 지휘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과에서 보듯이 추이코프는 시가전에도 능했지만,

 기동전에도 능해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에는 벨로루시에서

  폴란드까지 하루에 100km 이상을 전진한 적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를 탈환후 소련군대와 시내를 행진하는 바실리 추이코프 - 1944년 5월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 당시에는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2 벨로루시 전선군에 소속되어

 베를린 공략의 주된 공격을 맡았다.

 경쟁자인 코네프 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하려던 상관의 우격다짐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는 헛수고를 했지만,

 결국 베를린으로 먼저 진입해 베를린 방어 총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종전 후에는 주코프와 소콜롭스키 휘하에서 독일 점령 소련군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1949년 4월에 개편된 독일 주둔 소련군의 사령관이 되어 1953년까지 재임했고,

이후 소련으로 돌아와 키예프 군관구 총사령관을 맡았다.

  1955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고,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을,

1961년부터 1972년까지는 소련 민방위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뒤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명예직인 국방부 총감이 되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도 역임하였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적백내전 당시 왼팔에 입은 상처가 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이코프는 이 부상 때문에 평생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용맹한 군인으로서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고 내버려 두었다.

 결국 이 상처는 1981년에 패혈증으로 악화되었고,

 9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모스크바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른 소련 원수들은 사망 후 모두 크렘린 벽의 묘지에 묻혔지만,

추이코프의 유해는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인 마마예프 쿠르간에 묻혔다.

주코프와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고,

 주코프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전선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추이코프의 이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