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소전쟁 당시 학살당한 우크라이나 여성들[German-Soviet War Ukrainian women holocaust victims Tragedy]

슈트름게슈쯔 2013. 10. 12. 18:11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인근 바비 야르 계곡(Babi Yar ravine)에 끌려온

 

 우크라이나 유대인 여성들 -  1941년 9월 29일

 

 

2010년 10월 5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인근 바비 야르 계곡에서 나치 독일군은

1941년 9월 29일을 시작으로 이틀 동안 유태인 33,700명을 학살시켰다고 발표한바 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과 거의 동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격파시켰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지칭한 키에프 전투에서는 66만 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보다도 악랄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중 4분의 일(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

(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엄청났다.

 

 

 

독일의 점령 치하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우크라이나 여성들 - 1942년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 산적들에게 살해당한 소녀 18세의 베로니카 코신스카 - 1943년 12월

 

 

위의 사진은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사실은 독소전쟁 당시 잔인한 우크라이나 산적들의 소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943년 겨울 우크라이나의  루이 우로닥치카라는 주교는 산적떼로 부터 지역 주민들의 보호하고

 정교회성당을 그들의 공격을 막아 방어하기 위하여 혼자서  자발적으로 참호를 파고 대비를 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산적들은 12월 6일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연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보로우스키 부그콤(Borowski Budkom)과 돌햄(Dolhem)및 오코폼(Okopom)이었다.

 마을로 들이 닥친 산적들이 처음 저지른 만행은 민가에 불을 지르는 행위였다

방화가 일어나자 마을 주민들은 모두 숲속으로 도망을 치며 몸을 숨겼다.

하지만 정교회 주교는 자발적으로 정교회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주교는 가림막이 보이는 곳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성당으로 침입하여 제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그의 목전에서

끔찍하게도 18세의 소녀 베로니카 코신스카(Veronica Kosińska)와

90세의 노파 루시 스쿠르진스카(Lucy Skurzyńską) 두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그리고 산적들은 주교에게 가리키며 당신도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산적들은 주교를 납치하여 벌거벗긴후 채찍으로 가혹한 매질을 가한후

뚜껑이 열린 관에 넣고  나무에 묶은후 벌겋게 달구어진 쇠못을 망치로 쳐서 발등에 박았다.

결국 마을의 주교는 우크라이나 야만인들에게 전인하게 살해당하며 순교한 성직자가 되었다. 

그들은 주교를 나무에 묶고 강간한 열두명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차례로 톱질을 하며

몸통을 절단시키는 장면을 주교로 하여금 보게 하였다.

나무에 묶인채 심한 고통을 겪던 주교는 바로 몇시간후 사망하고 말았다.


 

 

 

photo from : forum.gazeta.pl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