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nch Tank

프랑스 해방 이후 처음 제작했던 전차 AMX 50 포슈 자주포[First liberated France Tank AMX 50 Foch Self Propelled Gun]

슈트름게슈쯔 2014. 4. 14. 13:57






2차 세계대전 말기 프랑스의 해방후 처음 제작된 전차였던 AMX 50 포슈 자주포




2차 세계대전 초기 전격전을 내세워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 기갑부대에 프랑스 전차대는 그야말로 

 맥을 못추고 전멸되어 대부분의 기갑병기들은 파괴되거나 다른 무기와 함께 전량 독일군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그리고 그 무기들은 독일군이 전선에 배치시켜 다시 그들의 무기로 활용하였고

파손된 병기들은 수거하여 열차편에 실려 독일의 제철소로 보내져 용광로에서 용용되어 재활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군대는 다른 나라를 빼앗으려는 독일 군대에 비하여 

자기 나라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격렬한 전투 정신이 희박했다.

그 단적인 예로써 독일군이 침략 해오는 최전선에 프랑스 전차대가 투입되면 연료를 보급시켜줄 

유류부대는 먼곳에서 제각기 따로 놀고 있었고 연료가 떨어진 프랑스 전차병들은 

독일군을 피하여 아예 전차를 버리고 바로 후방으로 도주하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가 독일로 부터 해방되자 

영국에 망명해 있던 프랑스 드골 망명 정부는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비를 가다듬은지 1여년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인 1945년 3월에  

미국에서 지원받은 전차들이 그들의 량에 차지 않았던지 

프랑스 육군에 배치시킬 신형 전차의 제작 계획을 바로 착수한다.

그것은 독일군에 짓밟힌 어정쩡 하고 변변치 못했던 프랑스 전차에 대한 

일종의 한이 맺힌 형태로 프랑스 육군이 구축하고자 했던 신형 전차 제작에 대한 발로였다.

이미 드골은 2차 세계대전 발발 5년전인  1934년 계급이 대위 신분이었던 시절 당시 프랑스 육군이 취해야 할

미래전의 형태를 예견한 기갑부대의 활용 전술에 대한 저서[미래의 군대]를 내놓았다.

그로부터 시간은 흘러 6년후 군비를 착착 강화시켜 준비해온 독일의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1940년 6월 3일 프랑스 제4기갑사단 사단장 드골 준장은 갓 취임한  폴 레이노 총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는 이미 프랑스를 침략한 독일 전차 2400대가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 내부로 물밀듯이 

파죽지세의 형세로 거침없이 쳐들어 오던 때였다.

총리 각하. 우리의 패인(敗因)은 프랑스군 지휘부가 저의 전차전(電車戰)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적이 먼저 이를 채용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국방차관 아니면 제가 창안한 전차군단(軍團)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그야말로 당돌한 내용이었다. 

당시 드골은 1주일 전 계급장만 별을 달았을 뿐 정식으로 장군 진급이 안 된 대령 신분이었다.

그러나 폴 레이노 총리는 이 낯 두꺼운 요구대로 드골을 국방차관에 임명시켰다.

드골을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폴 레이노 총리와 프랑스 제5군 소속  알사스 기갑부대 사령관 샤를 드골 - 1939년 10월 




프랑스 드골의 10만 양병설은 조선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과 그 맥락이 동일하다.

다만 같은 침략국에 대한 대비책이지만 독일과 일본 왜구라는 국가적 측면과 그 시대가 다를뿐이다. 

드골이 [미래의 군대]라는 저서에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 351년전인 1583년 

아시아 극동지역의 국가 조선의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 왜구의 조선 침략을 

미리 내다보고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고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던 것처럼 그로부터 351년후인 1934년에 드골 또한

[미래의 군대]라는 저서를 통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전차군단 10만명의 양병(養兵)을 주장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군 지휘부와 유력 정치인을 쫓아다니며 전차군단 창설을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이에 프랑스의 군 지휘부와 정치인들은 드골을 골칫덩이로 취급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드골의 진정한 독자는 국경 너머 독일에 있었다.  

그 독자중 한명은 독일 전차군단을 이끌고 막 파리로 진격하고 있던 

독일 제19 전차군단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이었다.  

독일로 부터  침공을 받은 그 전쟁에서 프랑스는 5월 10일 개전(開戰) 

6월 14일 파리 함락, 6월 22일 항복이란 치욕의 역사를 썼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드골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 대구경 포와 장갑차의 위력을 실감하고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완전한 [기갑사단]의 창설과 그를 이용한 기동전의 확립을 역설했다.

하지만 타고난 뻣뻣하고 고집스런 성격탓에 당시 프랑스군 지휘부에서는

 [전쟁광][망상증 환자]취급 받으며 번번이 무시되었다.

 다만 드골의 기동전 개념은 전차가 주력이라는 부분까지만 이르렀을 뿐, 

정작 더욱 중요한 항공 전력과의 연대를 생각치 못한 반쪽짜리여서 그것이 

프랑스 육군에 도입되었더라도 독일의 전격전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에서 그 정도 수준이라도 기갑부대를 전면에 내새운 기동전 개념을 이해하고 있던 인물도 없었다.

 당시 프랑스군 지휘부는 마지노 선으로 대표되는 참호전을 맹신하고 있었다.

 드골은 이를 패자의 전략이라고 비판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비시에 정부가 세워질 때 쯤에야 받아들여지고 만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나라가 끝내 독일에 넘어가게 되자 

드골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프랑스의 망명 정부를 세운다.

신형 전차 제작에 앞서 프랑스 병기국은 우선 미 육군의 M4 셔먼전차를 

신형 프랑스 전차의 벤치 마킹 모델로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군의 T-34 전차와 독일군 전차의 차체 또한 신형전차 제작의 벤치 마킹 모델로 삼는다.

그에 따라 우선 신형 전차의 이름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포슈 장군의 이름을 따서 포슈로 정하고

신형 프랑스 전차에 탑재시킬 주포는 90mm 구경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부무장으로 Reibel 7.5mm 기관총을 장착시키고 무게는 50톤 정도의 자주포를 제작하게 된다.

신형전차의 구조는 포탑이 없는 형태로 35도의 경사진 전면 장갑의 두께는 180mm였다.

또한 엔진은 850마력의 독일제 마이바흐 12기통 HL 295 12VC 형을 장착하였다.

프랑스가 새로 제작하려고 시도한 신형전차는 미국 M4 셔먼전차의 형태를 기본 베이스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작된 신형 전차는 차체 측면이 셔먼전차와 비슷한 수직 장갑 구조의 형태가 일부 비슷할뿐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전면 경사각과 측면 바퀴의 구조등이 

독일 육군의 구축전차 야크트 판터를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 전장에서 어떤 전차라도 

모조리 격파시킬수 있었던 탱크 킬러로서 명성을 떨쳤던 야크트판터 독일 구축전차가 

연합군 전차를 상대로 치른 실전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이자 

전쟁 초기에 어정쩡했던 프랑스 전차대를 괴멸시킨 독일 기갑부대의 전차를 본보기로 

벤치마킹 할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의 한계이자 

전쟁기간내 형성되었던 독일 전차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 보이는 형태이기도 했다. 





photo from: survincit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