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몬테카시노 모나스테리 언덕과 라피도강
2차 세계대전 당시 몬테카시노 전투 이전 언덕 위의 온전했던 수도원의 모습 -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격전지중의 한곳이었던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의 전투 이후 황폐하게 변해버린 모습 - 1944년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 중 가장 격열했던 전투를 치른곳 중의 한곳이다.
이곳에 독일군 공수부대가 몬테카시노 산을 방어거점으로 구축시키고
미국과 영국및 프랑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맞섯던 방어전투의 전장이였다.
몬테'라는 단어는 '산'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당시 이탈리아 전선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반부를 포기하고 로마는 계속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서서히 후퇴하는 독일군과
이를 추격하는 연합군의 추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한 후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방어하기 위해서 독일 공수부대를 급파시킨다.
전선에 도착한 독일 공수부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 몬테카시노 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곳에는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서 방어를 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도원은 중세시대에 지어졌으며 거기에는 가치있는 고문서들이 많이 있는 중요한 유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 케셀링 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연합군 지휘부에도 이 메세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연합군은 적군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던데다
산 정상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도원이 무척 거슬리는 것도 있었고,
우연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문서를 연합군이 입수했는데,
돌로 된 외벽의 두께만 3미터에 육박하는 수도원이므로 어지간한
야포 따위로는 타격을 가할수 없다는 문젯점에 다들 경악했다.
결국 연합군 고위급은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관측병이 수도원까지 올라와서
관측할지도 모른다'는 등의 핑계를 들어서 수도원을 포격과 융단폭격을 통해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무리한 폭격이 감행된 이유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투는 산과 강 같은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낀 독일군의 우주방어를 뚫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린데 반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당장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한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니 화력지원도 없이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전투를 병행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참고로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자 529년에 세워진 매우 유서깊은 곳이었다.
가톨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성 베네딕토가 직접 머무르던 수도원이었다.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사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방어선의 독일군 사령관 케셀링은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 결정을 연합군에 통보까지 한 상황이었다.
미군의 폭격예고 삐라를 본 수도원장은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B-17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독일군 중령 율리우스 슐레겔(Julius Schlegel)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
한편, 이렇게 수도원이 박살나서 더 이상 방어거점으로서 작동을 못하면
그나마 미군에게 위안이 되었겠지만, 원래 튼튼했던 요새였던만큼 아무리 폭격으로 두들겨 패도 폐허가 남았고
이 폐허가 보병에게는 매우 유용한 은엄폐를 재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눈치볼게 없어진 독일 공수부대 대원들은
이 남아있는 수도원의 폐허 속에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연합군이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공세를 가해도 번번이 패퇴하는 등,
결국 문화유산도 날려버리고 민간인 살상도 한데다 적군에게 방어진지도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연합군은 이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병력에 몇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던지라 한번은 양측의 전선이 10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는 '블라디슬라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군단은
특히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프랑스 원정군단(FEC) 소속된 모로코의 구미에족으로 구성된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은 험한 산악지형이라 카시노 산을 등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연합군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산악지역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챈 케셀링 원수의 명령으로
독일 공수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지금 몬테카시노 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어
그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것은 몬테카시노의 초록 악마들이었다.
결국 몬테 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폴란드군이었고 전사자 수만도 4,000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 냈다.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폴란드군은 우리의 자유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우리의 육체를 이탈리아의 흙에 우리의 마음을 조국 폴란드에 바쳤다.
이탈리아의 푸른 악마였던 독일 정예와, 각종 우주방어라인을 분쇄하여
질주한 미군의 전과도 눈부시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폴란드군도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몬테카시노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로써 총 5회 파괴되고 5회 재건되었다.
현재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하단부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롬바르드족의 얼굴을,
우측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군용 철모와 폭탄을 새겨넣어,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전투 당시 이곳에는 Krupp K5라는 그나마 실용적인 열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K5는 일반 철로에도 쓸 수 있어서 한동안 갈긴 뒤 터널 등으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후퇴할 때 폐기되었으며, 잔해는 연합군이 확보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