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네덜란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WW2 Dutch Jews Girl Anne Frank]

슈트름게슈쯔 2014. 5. 28. 13:06





독일군에게 점령되기전 암스테르담에서 친구 한나 고슬라와 함깨 노는 


네덜린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 1940년 5월 











안네 프랑크가 은신해 있던 집의 비밀문으로 이용된 책장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략에 이어 1년후 

1940년에는 서부 유럽을 침략하였다.

 독일은 중립을 선언한 네덜린드 암스테르담을 폭격하고  항복을 받아낸 후 

바로 네덜란드 전 지역 점령 하였다.

그리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지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로 갔다. 

안네는 은신처에 가던 날의 모습을  나치의 인종차별 때문에 자동차나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갓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

(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에서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기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불어,영어,지리,역사등을 공부한 이야기와  독후감및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된 안네의 일기 






일본인들이 훼손시킨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4년 2월 25일 일본의 각종 도서관에서 이 안네의 일기를 비롯하여 

각종 홀로코스트 관련 서적이 인위적으로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쿄에서만 300권이 넘는 권수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에 경악한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이 진상조사를 촉구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와 경찰이 수사 중에 있다. 

일각에서는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틈을 노린 극우의 만행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마침내 범인이 잡혔는데  범인은 안네의 일기가 대필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적 훼손시 장갑을 껴서 지문을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그러나 체포후 언동이 불안정하여 그러한 정신 상태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보고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안네 프랑크가 은신해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의 모습




2차 세계대전 종전후 2년뒤 안네 프랑크  은신처 모습 - 1947년 







 

안네 프랑크가 은신해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의 근래 모습 - 2012년 9월 2일 




2차 세계대전 말기였던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게슈타포는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8명 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에서 끝나 있다. 

한국  B.S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연합국에 의해 해방되기 2달전이었다. 

그녀위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사망해버렸다. 

그리고 안네 프랑크의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의 죽음을 본 안네가 상심이 커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고트와 안네의 시신은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이후 시체보관소에서 친구가 거두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망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고,안네의 남편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에 대한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photo from : sarahlynnpablo.word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