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안경 쓴 유대인[WW2 Nazi German Buchenwald concentration camp Jews man wears glasses]

슈트름게슈쯔 2014. 7. 2. 13:47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행 열차에 갇혀 있는 폴란드에서 잡혀 온 유대인들 




강제 수용소행 열차에 갇혀 동료와 같이 바깥을 내다보는 안경 쓴 유대인 남성 










독일 뷰헨발트 강제수용소의 고통으로 견디지 못하고 전기 철조망 울타리에 몸을 던진 안경 쓴 유대인 남성 


뷰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던 이름 모를 이 유대인이 누구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중에서 안경을 쓴 자는 많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은 강제수용소행 열차속의 안경 쓴 유대인 사진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던 안경쓴 유대인의 사진들 4장을 모아서 

얼굴 이목구비의 윤곽을 자세히 비교 검토하여 유추해 볼때 

전기 울타리에서 숨진 유태인 남성과  폴란드 게토에서 강제로 끌려왔던 유대인 남성은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얼굴 윤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령이 40대 전후 인텔리 계층의  남성으로

전기 철조망에 울타리에 목발 1개가 같이 있는것으로 보아 

강제수용소로 끌려 온후 다리를 다쳐 부상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유대인 남성이 어릴적부터 소아마비였거나 

장애로 인하여 목발을 사용하는자였다면 강제수용소로 끌려오기 전에 

이미 총살을 당했을 소지가 대단히 높다.

위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유대인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잔혹하고 끔찍했던 나치 독일의 

그 어떤 강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들보다도 처절한 형태의 사진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처절한 사진으로 터부시 하며 얼굴을 돌리기 이전에 

 후대의 인류중 의로운 사람의  한사람으로써 

그 사진속에 담겨진 깊은 슬픔에 가득찬 인간 본연의 진의를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한다.

이 유대인은 당시 나치 독일군으로 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의 정신적,육체적 슬픔을 

간접적으로 나마 후대의 인류에게 두고 두고  알릴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역사의 자료로 남겼다.

 이 유대인은 평온한 얼굴로 숨진 마지막 자기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서

약소민족의 비애를 인류에게 그대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뷰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전기 철조망 울타리에 목숨을 던진 유대인들을 망연 자실히 쳐다 보는 미군 병사 -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의 학대와 고문및 기아와 질병의 고통때문에 전기 철조망에 목숨을 던진 수감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사망한 유대인의 사체를 거두는 소련군 병사들 -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독일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인근의 많은 부속 수용소들을 합치면 나치가 건설한 가장 큰 수용소 중 하나였다. 

나치 SS 당국은 1937년 7월 독일 중동부 바이마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부헨발트를 개소하였다. 

수감자는 수용소의 북부("주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경비대 막사와 수용소 관리소는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는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울타리와 감시용 망루및 기관총을 설치시킨 일련의 보초들이 주요 수용소 주변을 둘러쌌다.

 SS는 종종 마구간에서 수감자들을 총살하기도 하고, 화장장에서 교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초기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수용자 대부분은 독일 정치범들이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이후 독일 SS와 경찰은 10,000명에 가까운 유태인을 부헨발트로 보냈다.

 이곳에서 그들은 당국의 극도로 잔혹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SS는 또한 범죄자, 여호와의 증인, 로마니와 신티족(집시), 독일군 탈주병을 부헨발트에 감금하였다. 

수용소의 나중 단계에서  SS는 다국적의 전쟁포로(미국 포함), 저항투사, 독일 주둔 국가의 전 정부 관리도 감금하였다.   

1941년부터, 다수의 의사와 과학자가 부헨발트 수감자를 상대로 의학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은 주로 전염병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결과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부헨발트 수용소 시설은 독일 전쟁 지원을 위해 강제 동원된 노동력의 중요한 출처가 되었다. 

1942년 구스틀로프 회사는 병기 생산을 지원할 보조 수용소를 부헨발트에 건설하였다. 

SS 당국과 사업체 간부들은(국영과 민영 모두) 수감자를 88개 이상의 보조 수용소에 배치하였는데

 그것은 대부분 병기 생산 공장, 채석장, 건설 프로젝트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2월에는 수감자 수가 급증하여 112,000명에 이르렀다. 

SS 간부는 부헨발트 수용소시설 전역에 걸쳐 정기적으로 "선발" 과정을 수행하여 

너무 약해 일할 수 없게 된 이들을 소위 안락사 시설로 불리는 곳으로 보내 그곳에서 독가스로 살해하였다. 

부헨발트에서, SS 의사들 역시 일할 수 없게 된 수감자들을 독약인 페놀을 주사하여 살해하였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휩쓸자, 독일은 수천 명의 수용소 수감자를 이송하였다. 

아우슈비츠와 그로스-로젠에서 대부분 유태인인 10,000명이 넘는 수감자가

 길고도 잔인한 행군 끝에 1945년 1월 부헨발트에 도착하였다. 

1945년 4월 초, 미국군이 진격해 오자, 독일은 부헨발트와 보조 수용소에서 약 30,000명의 수감자를 이송시켰다. 

이 수감자 가운데 3분의 1은 극도의 피로 때문에 사망하거나 SS에 의해 사살되었다.

 부헨발트에 있던 지하 조직인 수감자 레지스탕스 조직은 나치 지령을 차단하고

 이송을 지연시켜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1945년 4월 11일, 해방을 기대하던 굶주린 수감자들이 망루를 습격하여 수용소를 장악하였다. 

당일 미국군이 부헨발트로 진입하였다.

 미군 제6 기갑 사단 군인들이 21,000명 이상을 찾아냈다.

 1937년 7월과 1945년 4월 사이에, SS는 유럽 전역에서 250,000명을 부헨발트에 수감시켰다. 

수용소 당국이 온전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추정에 따른 것으로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SS는 부헨발트 수용 시설에서 56,000명 이상의 남자 수감자를 살해하였으며 

그 중 약 11,000명이 유태인이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