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사건 당시 초췌한 중국 국민당군 총통 장제스와 그의 수하 장교
시안 사건 당시의 장제스(장개석)와 장쉐량(장학량) - 1936년 12월
시안 사건은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안 사건 발생이후 3개월간 중국내 정세는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총통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타이완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을 탓하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상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이후 국민당 정권내 대대적인 '친일파'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다.
또한 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공산당에는 4개항의 화평조건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
'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
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
계급투쟁을 포기할 것.
이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난징정부 내에서도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유화정책 강행하였고 2월에는 교묘하게 동북군을 이동시키고
서북군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키고 3월에는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서북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공산당과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대표자 저우언라이등과 여러차례 협상하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인다는 약속을 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으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사건으로 당시 열세에 있던
공산당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벌어진 국공 내전에서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어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게 되었고,
기존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국민당에 의해 타이완으로 이전했다.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사건은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뀐 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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