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사변 당시의 중국 청나라 의화단 - 1900년
의화단은 통일된 조직도, 권법도 없었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스스로를 권민(拳民)이라고 부르며
기독교를 믿는 교민(敎民)과 대적하며, 누런 황포로 머리를 감싸고 배는 붉은 색으로 가리고,
양권을 하여 신령을 몸으로 부르고, 큰 칼로 배를 내보여서 자르는 시늉을 한다든지,
인후로 창끝을 버티는 차력쇼를 벌렸다.
권법을 배우면 '도창불입(칼과 창을 들지 않는다)란 말이다.
의화단은 그 나이대도 10대부터 노인까지 골고루였다.
그들은 삼국지와 수호지에 등장하는 관우,장비,조자룡,마초,황충 오호대장과 양산박의 호걸들을 신봉하였으며
패왕상후권보다 더 총을 상대하기 적합한 의화권의 미신적 힘과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신천지로 나아가자는 환상을 민중들에게 급하게 확산시켰다.
향촌의 신사들도 그들의 물주가 되어주었다.
의화단의 등장은 그동안 진행된 태평천국 까지를 포함한 기독교문화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예배(미사)와 고해성사 문화는 "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것을 영아유괴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포교는 허락되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관료들의 시각이 가세했다.
백련교의 잔당도 이들에 합류했다.
의화단이 1899년에 반기독교 운동을 벌여 교회를 불태우며 소란을 일으키자
청 왕조는 위안스카이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으나 오히려 운동은 거세져 주변으로 파급되었으며
철도(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 등을 파괴하며 북경까지 확산되었다.
이후 성격이 반기독교 운동에서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우는 반외세운동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청 정부가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전투 끝에 8개국 연합은 톈진에서 청정부와 의화단의 연합 군대를 괴멸시켜버렸다.
이후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했으며, 이후 신축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를 사실상 반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 살상과 더불어, 주로 청조 황실 및 귀족의 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이 자행되었다.
영어권에서는 의화단 운동을 'Boxer Rebellion'이라고 지칭한다.,
그렇게 지칭하는 이유는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하는 걸 보고 "권투선수(Boxer)들 같다"고 평가했던 형태에서 나왔다.
의화단의 난은 중국권법에 큰 타격을 준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끔 중국권법인들은 많은 고수들이 여기에 참가했다가 몰살하여 그 비기가 끊어졌다고 둘러댄다.
의화단의 난 북청사변 전쟁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은 베이징 점령 이후 의화단원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의화단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거나 약탈과 살육,강간,방화를 자행한다.
베이징[北京]에까지 침입한 의화단은 관군(官軍)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공격하고
베이징이나 톈진[天津]에서는 의화단원이 거리에 넘쳐 그 세력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근교(近郊)의 농촌에서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은 10대의 소년이 많았으며
빨강·노란색의 천을 몸에 감고 팔괘(八卦)로 대오(隊伍)를 나누었다.
이들에게는 전체적인 지도자는 없고 동리마다 권단(拳壇)을 설치했다.
이 단이 의화단의 한 단위였으며, 대사형(大師兄)이라고 불리던 지도자가 단의 책임자였고
10대의 소녀들도 홍등조(紅燈照)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형성하고
대고포대(大沽砲臺)와 톈진에서 청나라 관군과 연합하여 의화단을 격파시켰다.
그리고 8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농성 55일에 접어든 여러 나라의 공사관원들을 구출하였다.
청조의 여제 서태후와 광서제(光緖帝)는 시안[西安]에 피신하고
실각한 수구파에 대신해서 실권을 쥔 양무파는 연합군에 협력하여 의화단 잔당을 학살하였다.
중국을 침략하는 열강군대의 일원으로 청나라 의화단을 처형시킨 일본군 - 1900년
독일군의 중국 청나라 의화단 처형 - 1900년
독일군은 1897년 중국 산뚱성 일대를 점령하였다.
중국 산뚱성 칭따오에서 유명한 칭따오(청도)맥주는
19세기말 독일이 청나라 산뚱반도 칭따오를 점령하여
맥주 공장을 세운후 생산한 독일 맥주의 후예이자 독일 식민지의 유물이기도 하다.
의화단 주동자의 공개처형
청나라 관군에 의해 처형되는 의화단 단원 - 1900년
위의 사진은 북청사변 이후 청나라 관군에게 잡혀 공개 처형되는 의화단 단원의 처형 장면이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에서 이 사진의 장면 상황 설명은 여러가지 형태로 잘못 알려져 있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이 장면을 중국 군벌의 마적 처형 장면이라도 하며
또 다른 중국의 사이트에서는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처형시키는 장면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당시 일본인들이 의화단을 처형시키는 장면은 따로있다.
아마 그것은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민족 감정의 결과에 의한 형태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조선인에 대한 오류인데
주로 일제의 조선 침략을 다루어 일제의 만행 사진을 보도하는 많은 사이트들에서는
위의 장면을 만주에서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는 조선 독립군이라고 설명해 놓기도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자세히 살펴 연구하지 않고 무리하게 애국심만 앞선 오판적 착각이라 할수있다.
또한 그것은 명백한 역사 날조에 해당한다.
단 한장의 사진이라도 잘못된 상황 설명은 세계에서 역사날조를 밥먹듯하는
일본인들에게 과거 역사를 왜곡한다는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그러한 틀린 설명을 게시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을 기록한 사이트들은
조선 독립군이라고 표기해 놓은 엉뚱한 착각과 무지한 오류를 시정하여
한시바삐 있었던 역사 그대로의 올바른 설명이 덧붙여져야 할것이다.
photo from : dingeengoete.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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