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을 방문한 영국 체임벌린 수상(가운데)을 맞이하는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드롭 - 1938년 9월
체임벌린 영국수상과 나치 독일의 히틀러
영국 체임벌린 수상과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뮌헨에 모인 유럽의 4 거두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수상과 프랑스 달리디에 수상과 나치 독일 히틀러 총통과 이탈리아 무솔리니 수상 - 1938년 9월 29일
체코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는 뮌헨 협정서에 서명하는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수상 -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서에 서명하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뮌헨 협정서에 서명하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
뮌헨 협정서에 서명하는 아돌프 히틀러
프랑스 파리로 귀국한뒤 기자들에게 뮌헨 협정서 내용을 발표하는 에두아르 달라디에 수상 - 1938년 9월 30일
수상관저로 복귀한뒤 그는 귀국시 예상치 못한 환호였다고 하였다.
그를 보고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아 ! 바보("Ah, the fools.")라고 한마디 내뱉았다.
영국 런던에 귀국한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며 연설하는
영국의 바보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 - 1938년 9월 30일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서명이 담긴 서약서이다.
체임벌린은 그 종이를 흔들며 "여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있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그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여 완전히 병합하여 그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1938년 11월 14일에 발표된 뮌헨 협정으로 독일에 넘어가버린 체코의 지도
1938년 9월 29일 독일 뮌헨에서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네 국가 수반이 모여
체결했었던 뮌헨 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1년간 늦추었던 유럽 열강국가간의 명백한 야합이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까지 세계의 분쟁중인 국가간 (한쪽의 항복 협정이 아닌) 평화 협정 결정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 사례의 본보기격 협정이기도 하다.
이 협정은 독일 뮌헨에서 합의되었기에 뮌헨 협정으로 명명되었다.
뮌헨 협정을 다른말로 뮌헨 회담으로도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4국 정상간의 회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결과물이 뮌헨 협정인것이다.
뮌헨 협정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럽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민족자결주의와 베르사유 조약 사이의 모순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은 역사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최초의 독립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도
독립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자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나라를 독립시키자니 국경선이나 영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졸지에 다민족국가가 되었다.
당장 국가의 핵심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다른 민족이었으며,
남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 지방의 헝가리인과 테셴 지방의 폴란드인, 동부 끝자락의 루마니아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국가 내 최대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주데텐란트의 독일인이었다.
중부 유럽은 오랜 기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 때문에 제국 내부의 행정구역상 구분만 있었지 국가 및 민족간의 확고한 경계선같은게 있을리 만무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시키고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주변국을 좀 크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것이 다민족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이었고,
이는 베르사유 체제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전면적으로 역행하는 일이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국민투표에 의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되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에 나뉘어진 게르만인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의 티롤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였다.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노리기 시작했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는 2개의 군사동맹국 프랑스와 소련 중 훨씬 믿음직한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서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지원을 할 의무가 있었다.
애당초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동맹은 독일의 성장을 막고 프랑스를 수비하기 위한 것으로
유사시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할 경우
체코슬로바키아가 후면을 쳐서 양면전선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나서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한 영국도 끌려나오게 되었다.
마침내 1938년 9월 위기가 본격화돠기 시작한다.
9월 13일 체코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전군에 전쟁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협박용이었으며, 실제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 본인이 서방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자충수라는 걸 잘 알았다.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영국군도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는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했으나 정부 안에서는 갑론을박에 휩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이 유사시 프랑스가 자신들을 위해 독일과 싸울 것이라 기대했지만,
프랑스는 반대로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체코가 후방을 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동상이몽인 관계였다.
한마디로 말해 서로간에 상대방을 구할 생각은 거의 없었고,
유사 시 상대방이 도와줄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프랑스가 먼저 동맹을 제의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당위성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맞붙기 싫은 프랑스는 당장 전쟁을 안 할 구실만을 찾았다.
일단 프랑스의 군부는 독일 국경선에 구축된 지크프리트 선 돌파에
상당한 시간 및 희생이 걸릴 거라는 암울한 보고를 했지만,
정작 지크프리트 선은 서류 상에만 있던 존재로 기초 공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에서도 전쟁이냐 협상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오갔고,
프랑스 총리 달리디에는 독일이 먼저 행동해야만 프랑스도 움직일 거라고 못을 박았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했다.
히틀러는 끝까지 주데텐란트를 요구했고,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을 제외한
다른 소수 민족의 분리는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 양자가 합의했다.
즉, 이 순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미 배신을 당한것이었다.
체임벌린은 뒤이어 주민투표에 의한 병합에 반발하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설득하기 위해
주민투표 없이 우리끼리 잘 영토를 넘겨주자는 참 편리한 방법까지 생각해내고, 프랑스는 여기에 동의했다.
동맹국으로 믿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하루 아침에 배신하자 격분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동맹국인 소련에게 지원 의사를 타진하게된다.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9월 21일,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1일 정오에 이 통첩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히틀러가 뒤통수를 쳐서 9월 15일의 합의를 파기했다.
히틀러는 이 시점에서 야심을 드러내어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합병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9월 21일, 제2차 체임벌린-히틀러 회담은 아무 소용없이 종료되었다.
9월 23일, 견디다 못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총동원령을 선포했으며
다음날인 24일, 프랑스가 동원령을 선포했다.
9월 26일, 히틀러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전쟁이 나더라도 프랑스가 개입하면
그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며 프랑스를 만류하고 있었다.
9월 28일, 또 다른 열강국가가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고,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뮌헨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주데텐란트는 독일에게 양도된다.
테셴 지방은 폴란드에게 양도된다.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게 양도된다.
회담 참여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 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걸로 바꾼 것 뿐이다.
즉 말이 좋아 양보이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협상으로 명백한 독립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는 버려졌다.
자국의 의사는 단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하고 영토를 주변국들에게 강탈당하였다.
더군다나 군사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자기들을 돕킨 커녕 팔아먹는데 협조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장 독일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인 주데덴란트가 병합되었고
그 곳에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이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으로 나오기까지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이 시기 양국의 여론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30~40대 남성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다.
끔직하기 그지없는 참호전과 독가스를 경험했던 이들은 그런 악몽같은 전쟁이 자기들의 살아 생전에 다시 벌어지고,
아들 세대가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인 양국의 정치권은 그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달라디에 총리의 경우는 본인부터가 1차대전 참전용사였다.
거기에 더하여 영프 양국은 독일측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괴벨스의 작품으로 독일의 군사퍼레이드와 선전영화 등의 영향으로 어느정도 쇄뇌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했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세계 대공황의 늪에서 막 빠져나오던 참에
아직 군사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이 체코와의 군사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프랑스는
위의 문제로 영국의 참여 없는 대독 단독개전을 두려워 하고 있어
외교적으로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와 헝가리도 이 틈을 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얻기 위해 독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랑스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 나라였으나
영토 욕심에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전쟁 계획을 망가트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막강한 폴란드군까지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은 외교적 명분론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엔 반대하면서도 주데텐란트 요구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니 당연하다라는
반응을 가진 영국-프랑스인들도 상당했다.
민족과 국가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외교협상 주도한 영국은 체코와의 이해관계가 적었고 체코를 옹호해야 할
프랑스는 군사문제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외교적으로 영국에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해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서 체코를 통채로 삼키고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다가 막강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주데텐란트의 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소련은 체코와 공동방위조약을 맺고 있었다.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프의 방관 속에 체코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자 영프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영프쪽에서도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폴란드는 소련과 방위조약을 맺는 것을 극력 거부해서
결국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것이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이었다.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은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희생시킴으로써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보려고 했다.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 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무력 침공을 한다.
그와 같은 모든 사태를 예언하고 경고했던 윈스턴 처칠은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오르자
유럽의 강도 국가로 떠오른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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