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정조대의 역사와 사실[Chastity belt History and Facts]

슈트름게슈쯔 2013. 12. 1. 19:27

 


 

정조대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성폭행을 가하려는 남자들로 부터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고안 장치였다.
그 정조대의 재질은 두꺼운 가죽이었다.


 

그리스의 노예 소유주는 여성 노예에게 1차적으로 허리를 감싸는 벨트를 차게 하고

 2차적으로 그것을 연결시켜 만든 하복부 보호대 사이에 다리를 넣게 만들어진 정조대를 착용시켰다.


 

이 정조대의 주요 목적은 노예의 소유주가 여성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목적으로

사역과 아이들을 양육시키기 위하여 여성 노예가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리스의 노예 소유주는 이런 방식으로 여성 노예들을 통제하였다.


 

 

 


 

중세의 정조대 제작 방법 또한 고대 그리스의 공예품 정조대의 형태를 이어 받았다.
역사적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는 독일의 어느 황제는 대장장이를 시켜 자물쇠를 채울수 있는 정조대를 만들게 하였다.
그것은 황제와 부인이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에 질투심이 많은 아내를 감시할 목적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의 황제는 자기의 성에서 정원 영토 경계내로 볼일을 보거나 사냥을 나갈때 이 철제 정조대를 부인에게 착용시켰다.
 구멍이 한개 뿐으로 만들어진 이 정조대는 실제로 여성을 고문하는 도구와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황제의 아집에 의해 만들어진 이 도구는 여성 개인 위생에도 좋다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대장장이를 시켜 만든 이 철제 정조대의 열쇠는 하나만 만들어 황제의 다른 아내에게 맡겨졌다.
결국 이 철제 정조대는 질투심 많은 황제 아내를 감시 하는 불침번 역할의 도구로 작용했던것이다.

 


 

독일의 어느 군주는 혁신적인 정조대 발명을 성취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유럽에 널리 유행되었는데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우아한 정조대로 호평을 받았다.
이 모델은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정조대의 형태와는 달랐다.
정조대를 피부에 둔하게 닿게 하기 위하여 금과 은을 추가시켜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부 예술적인 형태를 추구하여 아름다운 조각과 상감 장식으로 세공하여 장식하였다.
그 모델의 최고의 사본은 이탈리아 베르가모와 베니스에서 만들어졌는데

그들은 그것을 베르가모의 성(castle)과 베니스의 창살(lattice)라 불렀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기에 회자되어 내려온 역사에 의하면 베르가모의

처와 정부들을 애태우기 위하여 정조대를 채워 잠궜다고 한다.

 

 

 


 

현존하는 정조대중 독특한 형태로 발견된것은 16세기의 정조대이다.
이 정조대는 젊은 여자의 시신이 묻혀있던 무덤에서 해골과 같이 녹슨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미 그 시기에 정조대가 대량생산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장식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정조대는 상당히 가격이 비싸졌다.
그것을 주로 이용했던 계층은 부유했던 상인계급이나 중산층및 왕족들 이었으며

남성들이 요구하는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혼기를 앞둔 처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딸에게 구혼을 청한 남자에게 자기딸은 보물과 같은 신부감이라며

 거의 어린시절 부터 베네치아의 창살이라고 불리는 정조대를 채워 기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사실 그시대에 15세의 처녀와 결혼을 한다는것은 정말 보물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비로소 사윗감이 될수 있는 조건의 관문을 통과한 자에게 결혼식 당일날 처녀의 어머니는

사윗감 남성에게 정조대의 열쇠를 건넨다.
그로부터 그는 그 귀중한 재산의 단독 소유주가 되는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중 몇년동안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들의 부인들에게 사용될 목적으로 큰 수요의 정조대가 만들어졌다.
기사들의 부인들은 굴욕스럽지만 남편에 대한 충절의 표시로 정조대를 속옷삼아 입어야 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러한 고통을 견뎌야했다.
가끔 그녀들은 가려워서 정조대가 가리고 있는 은밀한 장소를  문지르다가

그것으로 인해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심지어 욕창이 나기도 하였다.
그녀들이 정조대에서 해방될수 있는 형태는 남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순교자가 되었을 때였다.
교회에서는 전사한 기사의 부인에게 남편이 사망해버린 입장으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하기 위하여

 특명을 내려 자물쇠 제조업자를 시켜서  정조대로 인한 인생의 족쇄를 해체시켜 주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여성 해방 운동 이상의 규율을 넘어서는 조치였다.
하지만 그것은 부인에 대한 남펀의 염려성 질투와는 상관없이

교회에 충성을 끝까지 지킨 남편의 순교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조대는 또한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랜세월이 지난후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성에서 고대 여성의 무덤에 묻혔던 해골과 함께

 녹이 슬어 부식되어 버린 형태의 정조대가 발견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것이 십자군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군인의 정조대 열쇠의 주인을 찾지못하여

결국 가난하게 홀로 살다가 죽어간 과부일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으로 볼때 그녀들은 남편의 생사를 모른채 불가피하게 충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어가야 했었다.

 

시대는 정조대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창조시켰다.
그것은 정조대를 만들어낸 자들의 이중적인 교활성을 보여주었다.
즉 판매한 정조대를 남편외에 다시열수 있었던  열쇠는

돈이란 매개체를 정조대 제작자에게 지불하여 열쇠를 사서 다시 열수 있는 환상적인 열쇠로 작용을 한것이었다.
정조대를 착용할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정조대 제작자에게 엄청난 액수의 고액을 지불해야 열쇠를 얻을수 있었다.
그에 따라 비인간적이었던 정조대 열쇠에 얽힌 수많은 농담과 재미있는 에피소드 또한  양산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와같은 예의 하나는 프랑스의 동남부 지역에 위치해있는 그러노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은 중세시대 갑옷입은 기사가 성의 성문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된 색실로 짠 주단인 태피스트리 이다.
    
그 태피스트리에 나타나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여성이 창문을 통해

기사의 목걸이 사슬에 열쇠를 걸어주고 떠나는 기사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어 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관목 숲 뒤에 숨어서 그 장면을 엿보는 또 다른 기사가 있다.
그는 갑옷을 입지 않은 기사인데 그의 목에는 전쟁터로 떠나는

기사의 목에 걸린 열쇠와 정확하게 들어맞는 똑같은 열쇠가 걸려 있다.


 

 


 

학술적인 형태로 보면 질투심 많은 이들의 신뢰를 주던 정조대의 자물쇠와 벨트는 결코 신뢰할수 있는 장치가 아니었다.


 

정조대의 자물쇠를 비밀리에 풀어주는 형태는 정밀한 수공업의 기술을 가진 보석 세공업자들에게서 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성곽 내의 간통자들은 손톱이나 단검의 끝을 이용하여 정조대를 열어볼려고 해도 모두 실패하였다.
하지만 숙련된 장인들은 비밀리에 만든 걸쇠를 이용하여

큰 실수 없이 정조대를 고치는 형태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만약 외국인이 마스터 키로 오픈시킬려고 해도 정조대의 꽉 죄어진 스프링 잠금쇠 때문에

작은 쇠막대나 그와 유사한 금속 막대의 조각만 부스러기로 떨어질 뿐이었다.
따라서 정조대를 착용한 여성을 소유할려고 하는 자는 성적 재산의 소유자가 되기 위하여

그녀를 그의 보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줄기차게 그것을 풀려는 작업을 시도하여야 했다.    

 

 

1.유럽에서는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여전히 정조대를 주문 생산으로 제작하는 작업장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제품은 기계적인 자물쇠 뿐만 최신의 재료로 기술이 발전되었다.
그것은 전자 장치로 고안된 형태이다.
그곳에서는 2011년에도 150~200개의 정조대가 팔렸다.
이러한 형태를 보면 정조대를 제작하는 사업은 남성의 질투를 지원하는 영구적인 사업이라 볼수 있다.

 

 

 

 


 

 인도네시아 마사지사 여성의 정조대


 

 

2.현재 인도네시아 에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소수의 중국 여성들은 *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조대를 착용하기도 한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일부 마사지 업소에서도 정조대를 사용한다.
이것은 인도네시아의 행정에 따른 입장이기도 하다.
즉 그 마사지 업소는 방문하는 방문자에게 명확하게 성적인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는것을

 증명하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응하는 조치로 그곳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정조대를 입힌다.


 


3.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처음으로 남성의 정조대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남성의 자위 방지를 위해 발명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남성의 자위는 실명,광기,갑작스런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발명은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는 무고한 십대 조차 자위 행위가 건강에 해로운 형태로

 간주되었으며 전기를 사용하여 그 흥분을 제거해야 했다.


 


그에 따른 기계적 장치의 회원은 아침에 일어날때 하복부에 한정되어 있는 음모가 이용되었다.
즉 발기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족집게 핀셋으로 잡초를 뽑아 김을 매듯이 음모를 하나씩 뜯어 내었다.
그것은 실로 남성의 penis에 대하여 아픈 고통과 슬픔을 주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4년후인 1903년 추가적인 진행 상황의 단계로 이어져 나갔다.
1903년 겁쟁이의 양심(coward conscience)이라는 용수철과 기계장치가 발명되었다.
이 기계는 남성의 발기시 기계 센서의 회로가 닫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전류가 방전되어 남성의 발기가 사그라지게 하여 성적 흥분을 가라 앉히게 하였다.


 

이 다음에는 그 기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더 나쁜 형태의

사모바르 겁쟁이(samovar cowards)란 기계가 발명되었다.
그것은 신뢰할만한 기계공에게서 만들어졌는데 그 기계는 더 이상 10대 남자들에게

그럴듯한 자위억제 전기 장치로 속일수 있는 기계가 될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모바르 겁쟁이라는 그 기계 또한

남성의 자위행위를 억제시키기 위해 심사숙고한 연구가 진행된 끝에 만들어 졌다고 

신뢰할수 있는 기계적 장치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가공할 계획은 미성년자들의 마스터베이션을 막기 위해 lichili 병원에서 시도 되었다.


 

그것의 구조는 잠금 장치가 있는 멜빵 달린 벨트위에 가죽 반바지와

 금속 고리로 구성된 끔찍한 남성 자위방지 장치였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의 복장을 입힌 후 다른 한 사람의 보조원이 없다면 벗겨 내기가 불가능 했다.
이 장치를 입힌후 그곳에서 돌발적으로 penis에서 semen이 분출되는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이 장치를 고안한 목적 또한 미성년자들이 자위행위에 몰두하는 것을

 제거시키려고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09년 초엽에는 토끼를 잡아 고정시키는 올가미 덫과 같이 생긴 강철 조각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것을 한번 시험해본 결과 남성의 penis는 고정된 형태에서 체내로 흐르는 혈액의 흐름이 차단되었다.

 


 


photo from : live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