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张作霖 : 1875–1928)
장쭤린은 중국 만주 지역의 북양군벌계열의 봉계군벌이자 정치가이다.
중국의 동북 3개 성(省)을 지배하고 친일적 성향을 띠었다.
장쭤린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중국 성경성(盛京省: 지금의 랴오닝 성) 하이청(海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에 입대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도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체적인 군대를 조직했다.]
당시 다른 많은 군벌들이 그러하듯이 일종의 의적(義賊)질을 하였다.
당시 몰락해가던 청나라 조정은 이미 강력해진 장쭤린의 부대를 펑톈 성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장쭤린은 펑톈은 물론 만주까지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1918년 중화민국 정부는 장쭤린을 만주의 3개 성을 관할하게 하였고
그 이후 사실상 만주를 자신의 통치국가와도 같이 지배했다.
이후 다른 북양군 출신 군벌들과 다툼을 벌이면서 그는 점차 세력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고
민국 정부에서 다른 사령관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을 때 장쭤린은 이를 분쇄하고
오히려 세력을 더욱 넓혔갔으며 일본 제국으로부터 무기 및 물자, 보급품 등 지원받아가면서
성장해 나아가 1924년에는 지위가 막강해져서 수도 베이징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26년에는 베이징에서 대원수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점차 그를 압박해왔고 장쭤린은 이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그러자 막후에서 그를 지원하던 일본 정부도
결국 그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다나카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로 철수하도록 장쭤린에게 압력을 가했다.
만주에서는 일본군이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장쭤린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이 조치에 계속 불만이었고,
괴뢰 군벌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직접 지배권을 만주에 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는 일을 벌일 구실을 꾸미기로 결심하였다.
고모토는 장쭤린이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직속 부하를 시켜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한다.
그가 탄 열차가 봉천 교외 철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열차감시초소에서 도화선을 당겨 열차가 폭발했다.
장쭤린은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고 봉천의 병원으로 실려왔으나 치료를 받다가 55세 나이로 사망한다.
이것이 장작림 폭살사건이다.
경비를 섰던 일본 군인들이 현장에서 북벌군 두 사람의 시체를 찾아냈다.
그 시체에서 3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국민당 이름으로 폭파를 지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사실인즉 두 사람은 아편중독자로 관동군이 북벌군의 옷을 입혀 현장에 데려와
사살하고는 위조한 편지를 옷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가 암살된 날은 1928년 6월 4일이었는데 몇주 동안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지고,
그의 지위와 권력은 그의 장남인 장쉐량(張學良)에게 계승되었다.
사건에 세계의 모든 관심이 쏠렸고 조선의 독립지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운 일제와 손을 잡고 조선독립군을 압박하던 장쭤린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고모토의 상관이나 도쿄의 내각이나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고모토는 간신히 군법 회의를 면했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 폭파되어 불타는 만주 군벌 장쭤린(장작림)의 특급 열차 - 1928년 6월 4일
청나라가 무너진 뒤 혼란에 빠진 중국.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펑톈(지금의 중국 랴오닝성의 선양)의 군벌 장쭤린이었다.
일본은 그를 비호해주는 대가로 사실상 만주를 '간접 지배'하고 있었다.
1925년 장쭤린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는 '미츠야 야합'을 체결했는데
'장쭤린은 만주의 조선 독립운동가를 일본 영사관에 넘기는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상금을 받고,
장쭤린은 그 중 일부를 반드시 실제로 단속한 관원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뒤로 만주 관원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독립운동가 검거에 열을 올렸다.
1927년에는 도산 안창호 등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일제히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지린대검거사건).
일본과 장쭤린은 이처럼 야합해 '부적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8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군벌들을 쳐부수고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자,
본래 오합지졸에 불과하던 장쭤린은 패전을 거듭했다.
장제스와 결전으로 맞설 자신이 없던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탈출해
열차를 타고 자신의 본거지인 만주 펑톈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용 가치 없어진 장쭤린 폭살시켜 버린다.
'이대로 잠자코 지켜보면 국민당 군대는 만주까지 쳐들어와 장쭤린을 몰아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주 전역은 국민당이 직접 지배하게 되고,
일본은 지금처럼 만주를 간접 지배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생각한 일본은 이용 가치가 없어진 장쭤린을 제거하고
만주를 직접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참모가 입안한 음모였다.
1928년 6월 4일 새벽. 장쭤린에 탄 귀빈 열차가 지나가던 남만주철도 교차점에서 미리 매설해 두었던
다량의 폭약이 폭발해 장쭤린은 폭살당하고 말았다.
장쭤린 폭살사건의 전모는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일본은 자국과 조선에서만 '눈 가리고 아웅' 했다.
일본 관동군은 중국인 노숙자 3명을 현장으로 끌고 가 총검으로 찔러 살해한 뒤,
이들을 중국 국민당 요원이라 주장하며 범행을 덮어씌우려 했다.
그러나 3명 중의 1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현장을 탈출해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일본의 음모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장쉐량은 중국 국민당과 화해하고 '아버지의 원수' 일본과 대항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1928년 12월, 그간 장쭤린의 영향력 하에 있던 만주 전역에
중국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가 내걸렸다.
음모를 꾸몄던 일본은 도리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영향력 상실을 억지로 만회하려는 무리수가 1931년 만주사변의 원인이 되었다.
장쉐량(張學良 : 1898 ~ 2001)
장쉐량은 중국의 군벌 정치가였다.
그는 중국 북부 랴오닝 성의 하이청 출신이며 아명(兒名)은 장샤오량(張孝良)이다.
20세기 중엽의 중국 군벌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이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였다.
그는 중국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쭤린은 펑톈군벌의 수장이었으며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1928년 6월 7일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이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여성편력과 아편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쉐량을
중국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쉐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장쉐량과 장쉐량이 이끌게 된 봉계 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 관동군의 공격으로 만주 선양의 영향력을 잃었다.
1936년 반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뤄낸다.
장제스를 감금한 혐의로 10년 간의 징역형을 받았고,
출감 후 1949년에 타이완으로 끌려가서 중국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제스가 죽은 후, 1993년에 처음으로 중화민국 당국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 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향년 10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만주 군벌 장쉐량의 장갑열차
전선으로 향하는 군벌군 병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만주 어린이들
photo from : www.delcamp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