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일제가 창경원으로 만든 창경궁

슈트름게슈쯔 2015. 8. 12. 16:08

 

 

 

 

일제 강점기 당시 창경궁에 들어선 일본식 건물 장서각 

 

 

일제강점기 창경궁의 조류 우리 - 1930년대 

 

 

몰려든 인파로 운행되는 전차가 창경원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광경 - 1959년 3월 26일

 

이날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신 축하로 인한 무료입장이었다.

그 당시 그야말로 창경원 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것은 

장시간이었고 창경원을 구경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고 한다.

 

 

자유당 시절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모인 서울 시민들-  1959년 4월 12일 

 

 

일제가 창경원으로 만든 서울 창경궁 내부의 1915년 함인정 남쪽에 세워진 일본식 건물 장서각  - 1962년 

 

 

동물원과 놀이 공원으로 바뀌어 버렸던  창경원 시절의 창경궁 - 1963년 

 

 

서울 창경궁 내부의 일본식 건물 장서각 - 1966년 

 

 

 창경궁 내부의 하마 우리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 앞에 창경원 개원 65돌을 기념하는 큼지막하게 붙여져 있는 플랫카드 - 1975년 11월 1일

 

 

조선을 침략하여 1909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서울의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공개 관람을 시켰다.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그 명칭도 창경궁에서 격을 낮춘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다. 

이때 일제는 '백성에게 실물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위안 장소로 쓰도록 하라'는 설립 이유를 댔다.  

일제는 36년간 창경궁을 지속적으로 파괴했다. 

1910년대는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길을 내면서 두 곳을 갈라놓았고,

 문정전(文政殿) 근처 언덕에 장서각을 세웠다.  

나아가 1922년에는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고 동식물원을 확장했으며, 

1924년에는 낙타와 타조를 가두기 위한 우리를 건설하고 야간 개장을 실시했다.  

창경궁은 광복 직후에도 궁으로 회귀하지 못한 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문을 닫았고, 1·4 후퇴 때는 모든 동물이 추위와 배고픔에 죽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는 다시 벚꽃 명소로 명성을 떨쳤으며, 

정부는 1970년대까지 온실과 생물 표본관을 보수하고 하마와 물개를 위한 

옥외 공간을 설치하는 등 위락 시설을 계속 늘렸다. 

 특히 1969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 개장 60주년을 맞아 열대동물관과 식물원 동·서관을 개관했다.  

창경궁은 1984년 서울대공원이 문을 열면서 비로소 조선 궁궐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공원 개원에 앞서 1983년 동물과 온실식물, 생물 표본을 이관하고 공개 관람을 폐지했다.  

궁으로의 복원은 조선의 궁궐 정전 중 역사가 가장 유구한 명정전 일대를 원형에 가깝게 처리하고, 

궁궐 양식에 맞지 않는 시멘트 건물은 철거하며, 왕궁 조경의 특성을 살리고, 

야간 공개를 금지한다는 네 가지 원칙 아래 진행됐다. 

 복원 공사는 1986년까지 이어져 일본식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고, 1992년에는 장서각이 헐렸다.  

또 벚나무가 있던 자리에 소나무와 단풍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잣나무 등 

대한민국 중부 지방에 자생하는 조경수를 식재했다.  

창경궁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옥천교(玉川橋), 명정전이 잘 보존돼 있다.  

다만 후원 연못인 춘당지(春塘池)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상인에게 매입한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대온실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은 경복궁과 종묘를 없애고 조선 왕조의 맥을 완전히 끊는 대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고 사직단을 공원으로 바꾸었다.

광복 이후 창경궁의 역사는 일제의 잔재를 털어내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