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택리지 - 이중환

슈트름게슈쯔 2015. 9. 17. 00:34

 

단양팔경- 구담봉

 

 

 

 

단양팔경- 옥순봉

 

 

 

 

단양팔경- 도담삼봉

 

 

 

 

 

단양팔경- 석문

 

 

 

 

 

 

 

단양팔경 -상선암

 

 

 

단양팔경-중선암

 

 

 

 

 

단양팔경 - 하선암

 

 

 

 

 

 

 

단양팔경 - 사인암

 

 

택리지 - 이중환

 

 

대저 살 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山水)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런데 지리는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 되고,

생리는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으나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山水가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못한다.

 

지리(地理)

어찌하여 지리를 논하는 것인가.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 들의 형세를 본다.

다음에 산의 모양을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은 조산(祖山)과 조수(祖水)를 본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

은 집 천 간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서 구할 것이 다.

그러나 산중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水口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 어려우니,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있어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이나,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있게 판국(版局)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 된다.

막은 것이 한 겹이라도 진실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이면 더욱 크게 좋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랜 세대를 이어 나갈 터가 된다.

무릇 사람은 양명(陽明)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는 바,

하늘은 양명한 빛이니 하늘이 조금만 보이는 곳은 결코 살 곳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들이 넓을수록 터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와 차고

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또 병도 적다.

사방 산이 높아서 해가 늦게 돋으면서 일찍 지고,

밤에는 북두성도 보이지 않는 곳은 가장 꺼리는 곳이다.

이런 곳은 양명한 빛이 적고 음랭한 기운이 쉽게 침입하여 혹 잡귀가 모여들기도 한다.

또 조석朝夕으로 산 안개와 장기(瘴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가 사람을 병들게 하기 쉽다.

이 때문에 산골에 사는 것이 들에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큰 들판에 낮은 산이 둘린 것은 산이라 하지 아니하고 모두 들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빛이 막히지 아니하고, 수기(水氣)도 멀리 통하기 때문이다.

높은 산중이라도 들이 펼쳐진 곳이라야 바야흐로 터가 된다.

무룻 산 모양은, 조종(祖宗)되는 산은 다락집이 치솟은 형세라야 좋다는 감여가의 말이 있다.

주산(主山)이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상(上)이다.

뒤에서 내려온 산맥이 끊어지지 아니하면서 들을 건너다가 갑자기 높고

큰 봉우리로 솟아나고, 지맥이 감싸 돌면서 골판(洞府)을 만들어

궁내(宮內)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나며, 주산의 형세가

온중(穩重)하고 풍대(豊大) 하여 겹집이나 높은 궁전 같은 것이 다음이다.

사방에 산이 멀리 있어서 평탄하고 넓으며, 산맥이 평지에 뻗어 내렸다가

물가에 그쳐서 들판 터를 만든 것이 또 그 다음이다.

가장 꺼리는 것은 산의 내맥(來脈)이 약하고 둔하면서 생생한 기색이 없거나,

혹 산 모양이 부서지고 비뚤어져서 길한 기운이 적은 곳이다.

 땅에 생생한 빛과 길한 기운이 없으면 인재가 나지 않는다.

이러므로 산 모양을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무릇 시골살이는 물 복판이나 물가를 가릴 것 없이,

토질이 사토(砂土)로서 굳고 촘촘하면 우물물도 맑고 차다.

이와 같은 곳이면 살 만한 곳이다.

만약 붉은 찰흙과 검은 자갈이든지, 또는 누런 질흙이면 이것은 죽은 흙이다.

그 땅에서 나는 우물물에는 반드시 장기瘴氣 가 있는데 이와 같아서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무룻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짝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생성하는 묘(妙)함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은 반드시 흘러오고 흘러감이 지리에 합당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정기를 모아 기르게 된다.

이런 것은 감여가의 술서(述書 - 술법(術法)에 관한 책)가 있으니, 갖추어서 평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터는 묘터와는 다르다.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山中이라도 또한 시내와 간수(澗水) 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 가 된다.

무릇 조산祖山에 혹 돌로 된 추악한 봉우리가 있든가, 혹 비뚤어진

외로운 봉우리가 있거나, 흑 무너지고 떨어지는 듯한 형상이 있든지,

 흑 엿보고 넘겨보는 모양이 있거나, 혹 이상한 돌과 괴이한 바위가 산 위에나 산밑에 보이든지,

 혹 긴 골짜기로 된 충사(沖砂)가 전후 좌우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살 수 없는 곳이다.

산은 반드시 멀리 있으면 맑게 빼어나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맑고 깨끗하여

 사람이 한 번만 보아도 기쁨을 느끼며, 울퉁불퉁한 밉살스런 모양이 없으면 길한 것이다.

조수(朝水)라는 것은 물 너머의 물을 말하는 것이다.

작은 냇물이나 작은 시냇물은 역으로 흘러드는 것이 길하다.

그러나 큰 냇물이나 큰 강이 역으로 흘러드는 곳은 결코 좋지 믓하다.

큰 물이 역으로 흘러드는 곳은 집터나 묘터를 논할 것 없이

처음에는 비록 흥왕하여도 오래되면 패망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곳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흘러드는 물은 반드시 산맥의 좌향과 음양 이치에 합치되어야 한다.

또 꾸불꾸불하게, 길고 멀게 흘러들어 올 것이고 일직선으로 활을 쏘는 듯한 곳은 좋지 못하다.

이런 까닭에 장차 집을 지어서 자손 대대로 전할 계획을 하려고 하면

지리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여섯 가지(수구 ·들 ·형세·산 모양 ·흙 빛깔·물길·조산 조수)가 긴요한 내용이다.


생리(生利)

어찌하여 생리를 논하는 것인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미 바람과 이슬을 음식 대신으로 삼지 못하고,

 깃과 털로써 몸을 가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길러야 하니,

재리(財利)를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의 가르침에도 부하게 된 다음에 가르친다 하시었다.

옷을 헐벗고 밥을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돌보지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는 자에게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덕과 仁義를 말하라 하였겠는가.

대저 세상 사람이 빈 명망에는 민감하면서, 실용은 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매양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게 하는 까닭에,

남 몰래 악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체하는 자가 없지 아니하다.

이러므로 먼저 의식의 근원에 힘쓴 다음에 예의의 단서를 닦게 하여,

사람에게 악한 일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대저 푸른 소나무를 벗하고 횐 구름과 짝하며, 돌을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며,

아침 연기 속에서 밭을 갈고 저녁 달 아래 물을 긷는다는 그 명목이야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그러나 이것은 상고 때 예의가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민(民)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만약에 이런 것으로써 본(律)을 한다면 관례에 반드시 빈상(빈相에 食을 주도하는 사람)을

모시지 않으며, 혼인에 반드시 친영(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다시 신랑 집에 와서 혼인 예식을 거행하는 일)하지 아니하며,

초상에 반드시 관(棺)을 갖추지 아니하고, 제사에 반드시 제기를

쓰지 아니할 것이니, 이런 일을 어찌 오늘날에 행할 수 있으랴.

까닭에 인생이 이 세상에 있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는 모두 재물이 소용된다.

그런데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

땅이 기름지다는 것은 땅이 오곡 가꾸기에 알맞고, 또 목화 가꾸기에도 알맞은 것을 말한다.

논에 볍씨 한 말을 종자로 하여 70두를 거두는 곳이 제일이고,

40· 50두를 거두는 곳이 다음이며, 30두 이하인 곳은 땅이 메말라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인심(人心)

어찌하여 인심을 논하는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 인심이 착한 곳이 좋다.

착한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랴." 하시었다.

또 옛적에 맹자의 어머님이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도 아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마을은 풍속을 가리지 아니하면 자신에게만 해로을 뿐 아니라

자손들도 반드시 나쁜 물이 들어서 그르치게 될 근심이 있다.

그러므로 살 터를 잡음에 있어서 그 지방의 풍속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산수(山水)

산수는 어찌하여 논하는 것인가.

대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사람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매양 생각이 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옛날에 주부자(주자)가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냇물 굽이와 봉우리

꼭대기마다에 글을 지어서 빛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러나 거기에다 살 집은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봄 동안에 저 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어서,

 또한 제대로 나쁘지 않다." 하였다. 후세 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본으로 삼을 일이다.

 

 

무릇 산수란 정신을 온화하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사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거칠어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업이 풍부하지 못한 곳이 많다.

사람들이 자라처럼 숨어 살 수 없고 지렁이처럼 먹지 못하니,

한갓 산수만을 구해 살 수는 없다.

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과 지리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십 리 밖이나 한나절 거리 안에 산수가 빼어난 곳을 사 두었다가

때때로 오가며 근심을 풀고, 혹은 머물렀다가 돌아올 수 있다면,

이야말로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p.246)

이 중 특히 인심 편을 주목할 만한데, 이중환은 여기에서 팔도 서민들의 인심을 비교하여 논했다.

 그는 인심이 순박하고 두텁기로는 평안도를 으뜸으로 꼽았고,

그 다음으로 풍속이 질박하고 진실한 경상도를 꼽았다.

 반면 전라도나 함경도 등은 폄하했는데,

 이는 그후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중환은 이 편에서 사대부의 인심을 따로 살폈는데,

여기에서 그는 사색당쟁의 시초와 그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논하면서

당쟁의 폐해를 이렇게 통탄했다.

“대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건달패를 끌어들이고, 권세를 부려 일반 백성들을 괴롭힌다.

자신은 절제하지 못하면서 남의 비판은 듣기 싫어한다.

모두 한 지방의 우두머리가 되기만을 바라며, 당색이 다른 자와는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 못한다.

혹시라도 다른 당색끼리 이웃하게 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비방하고 욕한다.

 

 

 

이중환 [李重煥]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실학자.
우리나라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했으며, 이익(李瀷)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

아버지는 참판 진휴(震休)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했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자 남인(南人)인 그는 목호룡(睦虎龍)의 당여(黨餘)로

 지목되어 1725년(영조 1) 2~4월에 4차례나 형을 받았다.

1726년 절도(絶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실학자들의 저술 가운데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만큼 널리 읽혔던 책은 찾기 어렵다.

일반 지리서와 달리 이 책에는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함께

풍속과 역사 등 인문적 교양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읽는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던 이 책은『팔역지』,『사대부가거처』,『복거설』,

『택승지』,『동국산수록』,『진승유람』,『총화』,

『박종지』,『구우지』,『형가요람』,『동악소관』등

수많은 별칭으로 필사되어 퍼져 나갔다.

명문가 여주 이씨 집안에서 1690년에 태어난 이중환의 자는

 휘조(輝祖)이고, 호는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그의 부친 이진휴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지내고,

외직으로 여주목사ㆍ충청감사ㆍ강릉부사ㆍ함경감사ㆍ안동부사를 지냈다.

이중환은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여러 고을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부친은 1706년부터 1725년까지

20여 년 동안 수원에 터를 잡고 살았다.

성호에게 이중환은 집안 조카였다.

성호는 이중환과 자신의 관계를 “정의가 두터워 편지와

시를 주고받았으니, 떨어져 있다 하여

소식이 막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이중환의 빼어난 재주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부지런히 배우지 않고도 문장이 훌륭하였다.

젊은 나이에도 문채가 찬란하였는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다. …

이따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우리 문중은 평소에 글 잘 짓는 집안으로 일컬어졌는데 군은 더욱 뛰어났다.”
이중환은 24세가 되던 해(1713)에 과거에 급제했다.

그가 최초로 받은 벼슬은 승정원 가주서였다.

 당시 노론과 소론, 남인이 서로 대립할 때

그는 남인으로서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히 밝혔다.

1721년(경종 1년) 노론이 갓 즉위한 경종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왕세제[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자 남인들은 집단으로 노론을 탄핵했다.

남인들이 올린 연명 상소에는 이중환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는 1723년에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앞날은 밝았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그는 ‘목호룡 사건’의 주범이라는 혐의로 의금부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1722년에 노론 자제들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며

목호룡이 고발하여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4대신과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사건을 ‘신임사화’라 부르고 있다.

 

이때 목호룡이 이중환을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목호룡은 자신이 경종 살해 음모를 터뜨린 것은

이중환이 이잠을 높게 평가한 것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잠은 숙종 때 공작정치를 벌인 노론 김춘택을 처벌하고

 왕세자(경종)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매를 맞다가 죽은 성호의 둘째 형이다.

조사가 진행되던 1724년 8월에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했다.

 영조는 자신이 왕세제로 있을 때 소론에 의하여

여러 번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목호룡 사건의 조사도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목호룡은 신임옥사를 일으키면서 왕세제(영조)까지

 모함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되었다.

이중환은 사전모의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목호룡과 가졌던 인간관계마저 부인할 수는 없었다.

목호룡은 이중환의 처가와 같은 사천 목씨 가문의 서자로

 풍수를 보는 지관이었다.

이중환은 집안에 상을 당한 1717년에 목호룡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장지를 찾는다며 황해도와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함께 여행을 했다.

1721년 12월, 전염병으로 둘째 아들을 잃고 큰아들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이중환은 다시 목호룡을 찾았다.

목호룡은 아들을 잃은 이중환을 위로하고,

괴질이 잦아들 때까지 머물 수 있도록

임시 거처를 알아봐 주어 그곳에서 석 달간 머물렀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영조도 마침내 이중환을 국문하도록 명했다.

혹독한 고문을 4차례나 받았으나 이중환은 목호룡과의 다닌 것은

 순전히 장지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4년에 걸친 인간관계의 흔적이 분명히 드러난 상황에서

그의 해명은 별 설득력이 있질 못했다.

그가 혐의를 모두 부인하자 삼사(三司)는 거듭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조는 증거도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없다면서

사실을 대도록 다시 고문할 것을 명했다.

그는 1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혐의를 모두 부정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겨우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1726년 한겨울, 이중환은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잠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다시 변방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1732년 6월까지 그는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통해 여러 당파의 인재들을 안배해서

등용하던 상황에서도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64세가 되던 1753년에야 선왕을 곁에서 모시던 신하였다 하여

 통정대부라는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비로소 죄인의 굴레를 벗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유배에 풀려난 이중환은 사대부로서 살만한 곳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삶을 선택했다. 『

택리지에 따르면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을 여러 차례 다녔다.

이처럼 택리지는 실제 답사를 통해 얻은 생생한

지식이 현장감 있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유배 이후 그의 행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택리지』를 저술한 시기도 1751년 전후로 추측할 뿐 분명하지 않다.


이중환과 성호의 관계는 인생 후반에 더욱 각별했다.

성호는 이중환이 처음 택리지를 썼을 때 원고를 읽고

오류를 바로잡아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경제 분야를 서술할 때 『성호사설』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다.

 몇몇 필사본 가운데는 책의 끝 부분에 『성호사설

내용 일부를 부록 형식으로 싣기도 했다.

아래는 성호가 지은《택리지》 서문이다.

“사는 마을을 가린다는 말은 공자에게서 나왔다.

 사는 마을을 가리지 않으면 크게는 교화가 행해질 수 없고

 작게는 자기 자신도 편치 못하다

.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사는 마을을 가리는 것이다.”

“의식(衣食)이 모자라는 곳은 살지 못할 곳이고,

사기(士氣)가 사그라진 곳에는 살 수 없고,

 무력이 승한 곳은 살지 못할 곳이고,

사치한 풍습이 많으면 살지 못할 곳이고,

시기가 많은 곳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이런 몇 가지를 가리면 취하고 버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집안의 휘조(이중환의 자)가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장황한 수천 마디의 말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으려는 것이다

. 그 속에는 산맥ㆍ수세ㆍ풍토ㆍ민속ㆍ재물의 생산,

수륙의 운송을 조리 있게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니,

이런 글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나는 늙어 조만간 죽게 될 나이인지라 담비가 언덕에 사는 것처럼,

쥐가 구멍에 사는 것처럼 포구의 습한 땅을 벗어나지 못하니,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만 더할 뿐이다.

이러한 뜻을 책머리에 기록하여 어린 손자 구환에게 보인다.”

이중환은 1756년 초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 그는 “천하에 일이 생기면 반드시 서로 다투게 될

요충지”라고 한 황해도에 있는 선영에 묻혔다.

성호는 자신보다 아홉 살 아래의 조카 이중환의 묘지명을 지었다.

 태어나는 것은 차례가 있어도 죽는 것은 차례가 없기 때문이다.

 성호에게 이중환은 집안의 조카이기

이전에 “한마디 말”로 “마음이 통”했던 제자이자 동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