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일제강점기 당시의 군산

슈트름게슈쯔 2016. 4. 12. 01:43

 


일제강점기 초기 군산항에 쌓여 있는 쌀가마니.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호남 평야와 논산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전군(전주∼군산)가도’를 따라 군산항에 모인 뒤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군산은 삼국시대 백제의 “마서랑현”으로 시작한 유서깊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군산이 가장 크게 발전한 것은 부끄럽게도 일제강점기였다'

 민족의 한 맺힌 일제강점기의 역사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라북도 군산하면 퍼뜩 떠오르는 도시의 이미지는 

군산 항구의 뜬다리 부두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제까지 

장인정신 하나로 줄기차게 지속적인 영업을 해 내려오는 

군산의 명물 장수 빵집인 이성당 베이커리를 꼽을수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배우로 지칭되는 배우 설경구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1999년 영화[박하사탕]에서 주인공 김영호역으로 열연하며 

그의 첫사랑 윤순임(문소리)과 이루지 못했던 로맨스의 무대였던 

그 고장이 바로 전북 군산이었다. 

그러나 군산하면 설경구의 박하사탕 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인에게 각인이 되어 있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라도 호남평야를 비롯한 논산평야및 주변 지역에서 산출되었지만

 일본 본토로 빼돌려 식량으로서 일본인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항구 선착장 앞에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었던 조선의 쌀이었다,

바로 일제의 쌀 수탈이었다.

 1925년에 일제에 의해 출간된 '군산개항사' 내용에는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길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곳곳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1934년에는 그해 생산된

 1,672만 석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1만 석이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중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300만 석 이상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어 일본인의 배를 불렸다.

가증스러운 것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7년에

 이미 군산에는 일본인이 2,956명으로 조선인 2,903명보다

53명이나 더 많이 살았다고 한다.






군산의 장수 빵집 이성당 베이커리 







영화 박하사탕 속의 군산 항구 - 1999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보내는 쌀 수탈의 중심지였던 군산

 

  

 

1930년대 일본으로 수탈해 가기 위해 군산 내항에 쌓아 놓은 조선의 쌀가마니들

 

 항구 쪽으로 뜬다리 부두(부잔교)가 보인다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1920년대 본정통(해망로)

 뾰쪽한 지붕의 건물(오른쪽)은 미두장이며  멀리 조선은행 지붕(왼편)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가져갈 쌀더미를 선적하고 있는 조선인 부두 노무자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곧바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에 착수했다.

 토지소유권을 보호하고 토지세를 공정히 걷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토지는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비롯한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인들에게 싼값에 매각됐다.

당시 신문에는 소작인이나 지주들이 동척을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전남 나주에 있던 궁삼면(1914년 행정관할 구역 통폐합

이전의 전남 나주군의 지죽·상곡·욱곡면 등 3개 면)

토지 약 1200ha를 매입할 때는 권리를 주장하는 농민과 지주들을

 헌병이 포위한 뒤 동척 소유임을 강제로 인정케 했다.
특히 무지주 무신고 토지는 그대로 총독부의 소유가 됐고

강제로 매입이 이뤄져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충남대 허수열 교수(경제학)에 따르면 1900년대 초반 일본인 소유 논밭의 면적은

 전체의 10%대였지만 비옥한 토지를 주로 차지했기 때문에

 쌀 생산량의 비중은 25%나 됐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산계획을 펼쳐 천수답을 수리답으로 만들고

금비(화학비료) 사용을 강요했다.

 1921년 1400만 석이던 쌀 생산량은 1928년 1700만 석으로 늘었지만

 같은 기간 일본으로 빠져나간 쌀의 양은 300만 석에서

 700만 석으로 늘어 증산량보다 많았다.

쌀의 보관과 수송에 필요한 가마니 확보를 위해

 초등학생들에게 겨울방학 숙제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게도 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총독부가 식량 강제 공출에 나선 뒤

 식량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그들은 순사와 면서기를 앞세워 집 안에 숨긴 쌀 적발에 나서고,

 ‘조반석죽(朝飯夕粥) 운동’ ‘한 숟가락 덜 먹기 운동’도 벌였다.

 쌀이 귀해지자 총독부는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압착해

 쌀알처럼 만든 면미(麵米)를 유통시켰다.

 

 

 

일제강점기 군산 세관

 

오른쪽 뾰쪽한 지붕이 세관감시소

 

 

 

구 군산 세관의 최근 모습 

 

이 건물은 군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한제국 시절의 건축물이다.

 

구 군산세관 본관(69평)은 단층 건물로 여성스러우면서도 무게감 있는 외관을 보여준다.

 내부는 효율성을 위해 복도가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다.

천장의 화려한 조명등 흔적으로 보아서 각종 연회 행사장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사무실과 선박 입출항을 감시할 수 있는 망루 2개 동으로

구성돼 있었으나 1990년대 초 새 청사를 신축하면서 망루는 철거됐다.
건물 출입구 바닥은 화강석이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에 지붕은 우진각과 박공 형태가 혼합된 형식으로

물고기 비닐 모양의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마감해서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사용한 유럽 중세 건축양식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등과 함께 한국 건축사및 향토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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