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괴인열전

임표의 반란 -Rebellion of the Lin Biao

슈트름게슈쯔 2016. 9. 17. 15:57



임표(린 뺘오)와 마오 쩌둥 - 1936년 옌안





소련에서 귀국 직후 마오 쩌둥(毛澤東)의 요청으로 사진을 같이 찍는 린뺘오(林彪) - 1942년 2월 22일 옌안 




마오 쩌둥(毛澤東)과 린뺘오(林彪)의 카 퍼레이드 - 1966년 9월 9일 





중국 국가수립 기념일 텐안먼 성루에서 군중들을 향해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있는 

저우 언라이(周恩来)와 가운데 마오 쩌둥(毛澤東)과 린뺘오(林彪) - 1967년 




베이징 회의 중 박수를 치는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린뺘오(林彪)와 마오 쩌둥(毛澤東)과 그의 처 장칭(江青)-1967년 4월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린뺘오(林彪) 

중국 공산군대의 원수 계급을 수여 받았다.

그는 당과 군에서 고위직까지 올랐지만 한반도에 대한 6.25 침략전쟁 당시의 

부상 후유증 때문에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6.25 전쟁에서 북조선 괴뢰군의 침략에 맞서 유엔군이 북진을 했지만 

그는 마오쩌둥의 북조선 괴뢰국 출병 계획에 반대했다.

하지민 그후 린뺘오의 제4 야전군은 펑더화이가 맡아 북조선 괴뢰국으로 출병했다.

 1955년에는 인민해방군에 계급 제도가 도입되어 린뺘오는 중국 공산군대의 원수 계급을 수여 받았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펑더화이가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비판하자,

 마오쩌둥은 바로 펑더화이를 해임하고 린뺘오를 국방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펑더화이는 완전히 몰락했고, 린뺘오는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62년 중인국경분쟁에서 린뺘오의 지도를 받은 중국군이 인도군을 격파하고, 

당에서도 린뺘오가 류사오치에 맞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자, 마오쩌둥은 린뺘오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린뺘오는 이에 앞장을 서 절대적 존재가 된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군부의 강한 지지를 업고 점차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린뺘오를 경계했다.

그에 따라 마오 쩌둥은 린뺘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숙청의 준비를 실행시키고 있었다. 

1971년 9월 마오쩌둥은 중국 남부를 시찰하던중 린뺘오를 비판했다.

린뺘오는 자신에 대한 마오쩌둥의 비판을 숙청의 신호로 파악하고 

중국 공산군 공군 중위로 있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년 ~ 1971년 9월 13일)와 함께 

마오쩌둥 암살 및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동부 은드르항의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 관방의 공식발표로는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에 연료가 바닥나 몽골의 뚜얼칸지구에서 

급착륙하려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린뺘오의 갑작스러운 쿠데타 기도와 망명과 죽음은 아직까지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  

린뺘오 사후 장칭이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사실상의 최고집권자가 되었고,

 린뺘오를 반역자(汉奸)로서 규정하였다.

린뺘오는 사후 모든 공적과 당직이 박탈되었고, 

린뺘오와 공자를 비판하자는 비공비림운동이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 문화대혁명 때 

박해받은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는 복권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던 린뺘오는 결국 복권이 되지 못했다.

린뺘오 사건 2년후 1973년 8월 20일 중국 공산당은 린뺘오의 당적을 말소하고 

다시 10년 뒤인 1981년 1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는 

그를 린뺘오,장칭 반혁명집단'의 수괴로 확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에 중국 관방에서 린뺘오에게 뒤집어 씌웠던 공식적인 큰 죄목들이

 모조리 성립되지 않고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록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 린뱌오의 죄목들을 벗겨주고 있지는 않지만, 

린뺘오에 대하여 더 이상 비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의 혁명사를 각색하고 있는 

적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들에서 린뱌오의 업적을 기리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민해방군 창건 80주년때 중국군사박물관에서는 

'국방건설과 군대건설의 성과전'(国防和军队建设成果展)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전 시전을 기획하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 원수복을 입은 린뱌오의 모습을 공개 등장시켰다. 

이에 대하여 관방에서는 '실사구시하며, 객관적으로 보도하며

역사를 존중한다.'고 대서특필했다. 

뿐만 아니라 전람관의 관계자도 "이후 다시는

 린뺘오를 비하하거나 왜곡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표시하였다.

린뺘오는 1971년 9월13일 이후 마오 쩌둥과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되어왔다. 

마오 쩌둥의 사후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덩샤오핑의 시대에 와서도 

린뺘오에게 씌워졌던 죄목들은 벗겨지거나 또는 다시 새롭게 바로 잡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오히려 장칭등 '4인방'을 심판할 때에, 린뺘오와 한배에 탔다는 죄목으로 

10여년 가깝게 구금 중에 있었던 많은 린뺘오의 부하들이 모두 한데 묶여나와 

린뺘오, 장칭 반혁명집단'이라는 죄목으로 심판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장쩌민의 시대 때 제작되었던 3부작 대형 역사영화 

'대결전'(大決戰)의 '요심전역'과 '평진 전역' 편에서 해방군을 지휘하고 있는

린뺘오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다가, 

호금도와 온가보의 시대에 와서는 린뺘오에게 잘못 씌워졌던 죄목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관련 연고자들의 회고록들이 공개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들 회고록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린뺘오 반혁명집단의 성원으로

 당적과 군적을 말소당하고 판결까지 받았던 황영승, 구회작, 오법헌 등 

중국 공산군대 장성들의 회고록이다.

 구회작의 회고록이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2011년 2월 중국 북성(北星) 출판사에서 출판한 

‘구회작과 그의 아들의 심령의 대화’(邱会作与儿子谈文化大革命-心灵的对话)에서는 

특별히 라서경의 문제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었는데

린뺘오는 결코 라서경과 하룡을 해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몽골 동부 은드르항에 추락하여 파괴된 린뺘오 일가 비행기의 잔해 - 1971년 9월 13일 




추락한 비행기에서 발견된 린뺘오(林彪)의 사체




린뺘오(林彪)의 처 예췬(葉群·엽군)의 사체




린 뺘오(임표:林彪 - 1907 ~ 1971) 


린 뺘오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린여우룽(林育蓉)이었다.

그는 후베이 성의 황강의 작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5년 공산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8세 때인 이듬해 1926년 황푸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저우언라이와 소련 교관 바실리 블류헤르의 애제자가 되었다. 

같은 해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했고 몇달 사이에 소대장에서 시작해 

국민당군의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929년 대령으로 까지 진급하였다.

린뺘오 -임표(林彪)는 성이 수풀 림(林)자 이름이 1자인 범 표(彪)이다.

즉 숲속의 호랑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역술가들이 작명시 사람의 이름으로 

범 호[虎]자 및 범 표[彪]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면 

고집이 세고 허영심이 많아 실속은 없으면서 체면치레가 많고

말만 앞세우고 실천력과 인덕이 없이 자주 배신을 당하고

실직,사업실패,배우자와 가정불화,이혼,사별,질병등의 액운을 겪으며

낭비벽이 심한 글자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남편을 내쫓는 형이 되어 과부의 글자로 작용한다.

자기 집안의 족보에 기록된 항렬에 의한 좋은 글자를 두고서 

무턱대고 맹수의 용맹성에 도취되어 차칫 그릇된 오판을 하여 

그러한 글자를 이용하여 아이들의 이름으로 짓다가는 

나중에 반드시 불운한 운명으로 작용될수 있다.










중국 베이징 외곽 산허리의 동굴속에 설치되어 있는 임표(린뺘오)가 반란 실패후 

소련 도주시 몽골에서 추락했던 비행기를 복제하여 만든 벙커 바 - 2012년 7월 








photo from : www.dailymail.co.uk

        www.sacu.org

                multimedia.scmp.com

                 www.gettyimages.com

                    www.hindusta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