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풍경 - 2016년 9월 25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라마 불교 사원 - 2016년 9월 25일
몽골 성인 인구의 53 %는 불교를 신앙으로 가진 불교 신도들이다.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공식적으로 250 개 이상의 사원이
불교 사원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유사이래 전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녔던 대제국이었던
원나라가 멸망한 이유중의 하나는 라마 불교때문이다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 원나라는 100년을 채 못넘기고 멸망한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라마 불교와
피지배계층에 대한 지배층의 차별대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몽골인이 지배계층을 이루고, 관리들은 주로 색목인들이 차지하였는데
반해서 한족과 남인들은 피지배 계층을 이루게 되며,
몽골인들은 피지배 계층이던 한족과 남인을 인간이하의 대접을 대접을 하였다.
색목인과 몽골인에 대해서는 후한 대접을 하는 등 한족과 몽골,색목인을 따로 차별대우를 하게 된다.
이는 결국 홍건적의 난이라는 형태로 봉기가 발생되었고,
그로써 원나라는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결국 원나라는 신분차별로 인한 피지배 계층의 감정폭발에 의한 반동으로 무너졌다.
청나라는 한족과 만주족의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함으로써, 200여년 이상을 존속하게 되며,
미국은 노예제도 해방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다.
그리고 유태인과 집시족등을 차별대우 하고, 대량 학살까지 저지른
히틀러의 나치는 10년도 못넘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원나라의 멸망은 원 황실 자체의 약화와 지나친 민족차별에 반발한
한족의 봉기가 겹친 결과라 할 수 있다.
원 황실 약화의 원인은
첫째로, 원 황실이 사치와 라마교에 지나치게 탐닉하면서
대규모 사찰의 건축과 화려한 법회 등으로 국고를 탕진하면서
심각한 제정적 타격으로 국가의 혼란을 자처했다.
이는 곧 황실의 영향력 약화와 군비의 약화로 이어졌고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한
지나친 착취는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둘째로, 최근의 일부 연구에 따르자면 몽고의 유럽정벌 당시에 유럽에 창궐하고 있던
흑사병이 쿠빌라이의 사망으로 정벌군이 회군하면서 정벌군과 함께
병원균이 몽고지역으로 들어왔고 이후 이 지역의 토착질병화 되어
서서히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원의 군사적 중심지였던
이 지역의 인구를 줄임으로서 원의 군사력을 격감시켰다.
이처럼 원의 영향력과 군사적 저력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극도의 민족차별 정책과 경제적 수탈은 피지배 민족의 반발을 야기하여
각지에서 한족의 반란군이 봉기하였는데 이것이 원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한족 봉기의 도화선을 당긴 사람이 원말의 권신인 바얀이라는 사람이다.
바얀은 원말에 위왕의 직위에 있으면서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정사에 소홀한 틈타
원의 전권을 장악한 사람으로 극도의 몽고인 제일주의자였으며 상식을 넘어선 민족차별주의자 였다.
그는 한국 역사와도 관련이 많은 사람인데
유명한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가 바로 이 사람이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TV 방송 사극인 신돈을 보면
미약과 여색으로 황제를 조종하는 기황후에 대항하여
몽고의 정신을 지키고자하는 충신으로 그려지는데 실제상황은 그와는 전혀 반대였다.
사극안에서의 그는 몽고의 초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의 바얀은 초원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중원을 초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잖아도 몽고인제일주의로 민족차별이 심했던 원에서 바얀이 집권하면서
이민족 특히 한족에 대한 차별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달아 간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몽골족만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이요.
한족이 몽골 문자나 아랍 문자를 읽고 배우는 것, 특정한 색깔의 옷을 입는 것,
장수(長壽)나 복(福)과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것 등을 금지하는 많은 법령들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張)·왕(王)·유(柳)·이(李)·조(趙) 등의
성을 가진 모든 한족을 처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성들은 가장 보편적인 중국인의 성씨이므로 이 법령이 시행되었다면
90% 이상의 중국인들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마지막 법령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곳곳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사정이 이에 이르렀다면 한족들로서는 이미 단순히 민족의 해방이나
오랑캐로 부터 나라를 되찾자는 수준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가 되었으니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지경이었고
반란군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결사항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당시 그와 대립하고 있던 기황후 일파에 의해 바얀이 축출 당하면서
그의 광기도 막을 내렸지만 그때에는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바얀을 축출하고 원의 전권을 장악한 기황후는 자정원을 장악하여
황실의 자금을 통제하고 측근들을 동원하여 권신들을 견제하며
무능한 황제를 대신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을 제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 때 세계제국이라 불리웠던 원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다음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10년만 일찍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원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몽고의 몰락은 역사의 대세였고,
고려인에다 별다른 외척세력도 없었던 그녀가 몽고인 제일주의로 가득찬 원에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서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여성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기황후가 집권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중국 남부는 주원장이나 장사성 진우량 등의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결국 반란군을 통일한 주원장에 의해서 수도인 대도가 점령당함으로서
원은 중원에서 쫒겨나 몽고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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