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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프리카의 독재자 보카사의 황금 독수리 왕좌 -The Central African Republic Dictator Bokassa,s Golden Eagle Throne

슈트름게슈쯔 2016. 11. 18. 15:30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보카사 대통령과 부인 캐서린 - 1977년 12월 4일 


아프리카의 많은 독재자들 중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1921~1996)는 특히 지독한 악행과 기행을 벌였다.

 그는 흑인, 유럽인, 아랍인 등 다양한 인종의 부인 17명과의 사이에서 50여 명의 자녀를 둔 호색한이었다. 

어머니 날을 맞아 갑자기 모든 여성 죄수들을 석방하는가 하면 여성을 폭행한 남성들을 처형하고 

절도범들의 귀를 모두 잘라 버리기도 했다.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고 나서 1972년에는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이것도 성에 차지 않은 그는 자신이 흠모하는 나폴레옹처럼 되고자 

국호를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바꾸고 보카사 1세라 칭하며 황제가 되었다.

 1977년 오늘 열린 황제 대관식에 1년 예산의 절반인 2억달러를 써 국가 재정이 휘청거렸다.  

또 학생들에게 자신의 부인이 비싼 가격으로 공급하는 교복을 강제로 착용하도록 했다.

 이에 반발해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100여 명을 학살했다. 

과거에 이 나라를 식민 지배했고 보카사와 밀착했던 

프랑스는 1979년 11월,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켜 그의 체제를 전복했다.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1986년에 귀국,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었고 사면으로 풀려난 지 3년 후에 숨졌다








황제로 즉위한 대관식날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카사 대통령과 황후가 된 그의 아내 캐서린- 1977년 12월 4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보카사의 왕관  - 1977년 12월 4일 


중앙아프리카의 독재자 보카상의 황금 독수리 왕좌는 2톤 무게의 금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그의 75만 달러짜리 왕관에는 2,000개의 다이아몬드와 루비및 에메랄드를 박아 제작하였다. 

보카사의 황제 즉위식에 450 파운드의 장미 꽃잎이 그와 황후 앞에 흩어졌다. 

그의 측근과 친구들로 지명된 사람들은 60대의 메르세데스 벤츠 리무진에 태워져 

수십명의 백작과 후작및 공작과 영주에 의해 호위를 받았다



장 베델 보카사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3대 대통령이었다.

또한 그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였다

보카사는 우간당의 이디 아민 대통령및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독재자로 유명하다. 

보카사는 이디 아민이나 폴 포트처럼 대량 살륙을 했다기 보다는

 그의 수많은 기행으로 인해 기인 독재자 취급을 받는 면도 있다. 

그의 엄청난 사치 행각으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을 극빈국으로 만들었다. 

그러했던 보카사는 나중에 그의 조국에서 곱게 죽었다.   

보카사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보방기라는 마을에서 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긍의 아버지는 보카사가 6살 때 프랑스 기업에서 마을 사람들을 강제 징용하는 것에 

반항하다가 타살당했고 어머니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면서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했던 상황이  성장과정 이후 권력과 힘에 집착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보카사는 친척집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지역 선교학교에서 공부한 뒤 1939년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올린 전공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비롯한 무공 훈장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962년에 프랑스군에서 전역한 뒤에는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대장이 되었다. 

보카사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인 다비드 다코의 사촌동생이자 독립 전 자치령 시기의 총리 바르텔레미 보간다의 

조카였기 때문에 군부의 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1963년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년 뒤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보카사는 단순한 군인이 아닌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뒷공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촌형이자 대통령인 다코는 이런 보카사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했고 

심지어 훈장과 메달 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편집광 취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측근들이 보카사의 정치 공작에 대한 보고를 계속 올리자

 군대를 견제하기 위한 무장경찰대와 대통령 경호대를 창설했다.  

1964년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쪽의 킨샤샤 콩고와 북동쪽의 수단에서도 

이를 틈타 국경 침범 행위가 수시로 행해졌다. 

다코는 이 위기를 중국과 수교하고 차관을 들여오는 식으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차관 도입에 실패했고 고관들의 부정부패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65년 7월에 보카사는 다코의 명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일 식전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국했는데 식전 후 보카사가 귀국하려고 하자 다코는 입국 금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흥분한 보카사는 옛 프랑스군 동료들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군 동료들에게

 연락해 금지령 해제를 호소했고 다코는 대내외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귀국을 허락했다.  

이후 다코와 보카사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는데 

다코는 이제 노골적으로 군부를 무시하고 무장경찰대와 대통령 경호대에 

주요 예산을 책정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보카사는 부하인 알렉상드르 반자 대위의 협력을 얻어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65년 12월 31일에 다코와 내각 관료들은 송년회를 겸해 방기 남서부의 한 농장을 방문했는데

 그 틈을 타 보카사는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다코와 무장경찰대 총사령관 

장 이자모 등 휘하 관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몇 시간 뒤 다코는 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보카사 앞으로 끌려왔고 

보카사는 다코에게 대통령직을 사퇴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다코는 대통령직을 포기하고 가택 연금되었고 보카사는 이듬해 1월 1일 아침에

 방기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보카사는 집권 초기에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서민층과 군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쳐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또 일부다처제와 결혼 때 신부 측에서 강제적으로 지참해야 했던 지참금 관행, 여성할례 등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악습을 법으로 금지했고 대중교통 체제를 정비하고 

국립 관현악단을 창단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군부를 앞세운 폭력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보카사는 일단 사촌형인 다코를 사면하고 대통령의 고문이라는 (이름 뿐인) 명예직을 주기는 했지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이자모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중국 스파이와 정권을 찬탈하려고 한 반역자' 로 규정해 처형해버렸다. 

또 집권 직후 중국과 곧장 단교하는 등 노골적인 반공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쿠데타 성공 후 몇 년 뒤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반자와 점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반자는 보카사 집권 초기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새 군사 정부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고 프랑스에서도 공식 정부로 승인받는 등의 공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반자는 보카사가 자신의 향락을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군부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보카사는 이를 눈치채고 반자를 지지하는 부대를 국경 경비대로 투입해 

수도에서 떨어뜨려 놓았고 반대로 자신의 지지 부대는

 수도나 그 인근에 배치하는 등 반자와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1968년 4월에 단행된 내각 개편에서 보카사는 반자를 기존의 외교부 장관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보건부 장관으로 이임시켰고 

결국 반자는 보카사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자의 계획은 그가 포섭한 장-클로드 만다바 중위가

 이 계획을 보카사에게 폭로하면서 틀어졌고 반자는 곧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때부터 보카사는 노골적인 독재 야욕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1971년에 스스로 대장 계급을 단 뒤 이듬해에는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보카사의 독재 행각에 반발한 반정부 세력들이 1974년과 1976년에 쿠데타와 암살을 기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원래 보카사는 가톨릭 교도였으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를 만나고 난 1976년 9월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살라 에딘 아흐메드 보카사(Salah Eddine Ahmed Bokassa)로 개명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도로 가톨릭으로 원복한다. 

리비아의 자금지원을 계속 얻어보려는 의도였지만, 가다피가 돈 보낼 생각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1976년 12월에 정부와 의회를 해산하고 신헌법을 공표해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체제를 바꾸어 스스로 '보카사 1세' 로 자처하는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나치게 존경하고 있었던 보카사는 약 2억 달러에 이르는 경비를 지출한

 사치스러운 대관식을 마련해 황제가 된 뒤 가혹한 제정 통치와 

괴상한 법안 제정을 밀어붙이는 등 국민들의 생활과 자유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인권 탄압과 온갖 기행 등을 대놓고 자행하기 시작했다. 

사생활도 막장은 마찬가지여서 자기가 제정한 일부다처제 폐지 법안에 대해 불평을 하며 17명의 아내를 두고 살았다.   

그 때문에 서방 언론들은 보카사를 우간다의 이디 아민에 비견될 만한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로 비판했고 보카사가 아민처럼 

자신이 직접 반대파의 고문과 양민학살을 자행하고 희생자의 인육을 먹었다는 괴소문도 떠돌았다. 

물론 아민에 비하면 보카사는 양반이기는 하지만. 결국 197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자 

나라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보카사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79년 4월 중순에 수도 방기의 초등학생들이 보카사의 초상이 들어간 

값비싼 교복을 학생들에게 강매하는 방침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보카사는 이 시위도 마찬가지로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해 100여 명의 학생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전세계로 보도되어 비판받았고 결국 보카사 자신의 권좌마저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래도 아민만큼 악질은 아니었는지 최후는 그나마 조용한 편이었다. 

조국에서 편안히 자연사한 것만 봐도 그렇다.  

1979년 혼란이 심화될 즈음. 보카사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였지만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특사를 보내서 선정을 베풀라고 했다.  

그러나 보카사는  "감히 일개 대통령 주제에 어디 천하의 지배자 보카사 1세 황제에게 

이래라저래라인고!" 얼씨구 그 황제자리 누가 만들어 줬더라? 하면서

 특사를 개패듯이 두들겨패서 추방했다. 

이는 보카사 자신의 무덤을 판 미친 짓이었다. 

당연히 분노한 프랑스 정부는 1979년 9월 20일 다코를 지지하던 세력들의 비밀 협조를 받아 

방기 공항에 프랑스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바라쿠다 작전' 을 개시, 보카사 정권을 무너뜨렸다. 

다코는 이튿날 방송을 통해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복귀한다고 발표했고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해 정권을 장악했다.  

 프랑스군의 침투 당시 리비아를 국빈 방문하고 있었던 

보카사는 곧 코트디부아르로 도망쳐 4년 동안 체류하다가 프랑스로 망명했다. 

하지만 망명 중에도 자신에게 생활비로 지급되던 군인 연금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면서

 자신과 프랑스 정부 사이의 관계를 과장되게 서술한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했다가 

프랑스 법원에 의해 출판 금지령을 먹는 등 광역 민폐를 끼쳤다.  

보카사의 자서전은 결국 출판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서 보카사와 친분이 있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곤욕으류 치르게 되었다.

 심지어 보카사의 전성기 시절에 그를 자신과 절친이라고 언급한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도

 1981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막장 독재자와 놀아난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경쟁 후보인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패배하고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다만 정책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보카사에 대한 망명 허용이 비판받는 등 지내기가 영 껄끄러워지자 

1986년 10월에 사실상의 추방 형식으로 귀국했다. 

물론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1987년 6월에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된 식인 행위를 제외한 

13개 혐의가 모두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두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고 있던 

앙드레 콜링바 대통령은 이 판결에 반대해 1988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고 

이듬해에 다시 20년형으로 추가 감형했다. 

그리고 1993년에 콜링바가 자유 선거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자 

마지막 대통령 권한으로 보카사에게 특별 사면령을 내려 석방했다.  

 이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방기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3년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도 자신이 13번째 사도이고 

교황이 자신을 비밀리에 접견했다는 등의 헛소리를 지껄였다.







photo from : nationalvanguard.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