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왕안석의 전립과 이조년의 전립

슈트름게슈쯔 2017. 3. 18. 16:34



북송시대 신법으로 송나라의 개혁을 주장했던 정치가 왕안석의 전립 쓴 초상화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개혁가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이다. 

그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북송 시기에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그는 신법(新法)이라는 개혁책을 통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개혁하려고 노력했는데도 당쟁이 격화되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의 개혁 정치는 보수파에 매도되었지만 

문장력은 동료와 정적들이 모두 인정했을 만큼 뛰어났다. 

그는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왕안석의 정책은 국가와 일반 서민 층인 농민과 중소 상인들에게는 이로웠지만, 

대상인과 대지주와 권력자 등 기득권 세력에는 치명상이 될 만한 반발을 불러왔다. 

수많은 사대부가 대부분 이 계층의 출신이었기에 그 사람들은 정치상으로 

왕안석을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여 반대파를 구법파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신법파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1074년 희녕 7년 허베이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을 대상으로 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황태후와 내시 그리고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으로 퇴진 운동을 하자 신종도 왕안석을 사세부득이 해임하여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내홍이 일어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하지만, 1076년에 사직하고 은거한다.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하게 된다.

 신종이 사후 구법파의 황태후에 의해 재상이 된 사마광은 신법을 즉시 폐지한다. 

사마광도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죽고 신법과 구법의 가속된 당쟁 

즉 정치 혼란 탓에 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전립을 쓰고 몽골풍의 의복을 입은 고려시대의 문신 

매운당 이조년(李兆年: 1269 ~1343)의 초상화


고려는 13세기 중엽부터 원나라의 간섭기를 보내게 되면서 부터

귀족들의 복장은 이전의 신라와 송나라의 복장 스타일에서

100여년간 몽골풍으로 변하게 된다.

당시 왕과 관료들은 변발을 했다.

그러나 귀족들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은 변발도 하지 않았고 

몽골풍의 의복도 입지 않았다.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 (불관인사불성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 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시조는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봄 밤의 애절한 마음과 감상이 가장 잘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조년이 충혜왕의 잘못과 정치를 비판하고 충언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애절한 심정과 하소연이 잘 드러난 시조이며, 

충혜왕에 대한 충정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