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어 끊어진 신의주 철교 - 2013년 8월
지구 내부의 뜨거운 고열로 복잡한 규산염 암석이 용융돤 형태로
화산폭발시 지각을 뚫고 지표면으로 분출되어 흘러나오는 뜨거운 마그마가
굳어진 형태의 용암은 나중에 넓게 분포된 화산지형의 용암대지로 형성되게 된다.
한반도 북부에는 용암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한곳 있다.
그 곳은 바로 평안도 신의주 근처에 위치한 용암포이다.
역사적으로 바로 이 용암포에서 발생했던 유명한 두가지 사건이 있다.
그중 한가지는 20세기 초반에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발생했던 용암포 사건이다.
다른 한가지 사건은 20세기 중반기에 소련 공산주의의 한반도 북부 점령으로
발생했던 용암포 봉기였다.
전자의 용암포 사건은 1903년 압록강 주변에서 벌채사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이
용암포및 압록강 하구 일대를 불법으로 무단 점령하고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벌채권 조차를 요구하자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항의와 간섭으로 실패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뒷날 용암포는 러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한반도 북부의 고장이다.
후자의 용암포 사건은 그로부터 42년 뒤인 1945년 한반도의 해방 이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 공산주의와 북한 공산당 김일성에 대한 반대의 규탄과 봉기가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 부터 조국이 광복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북한 주민들은 북한 공산화를 위해 온갖 강압정책을 쓰고
민족 진영의 세력을 와해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소련 군정과
강간과 약탈 등을 일삼는 소련군의 만행에 끓어오르는 민족적 분노를 결코 참을수가 없었다.
또한 소련 군정의 앞잡이로 등장하여 애국지사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자행하면서
소련의 공산화정책을 적극 옹호하기 위하여 날뛰는 김일성(金日成) 일파와
공산당에 대하여서는 혐오감과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반소·반공 운동이 일어나고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그러한 가운데 1945년 11월 18일 신의주 서쪽 약 20km 지점의
용암포(龍岩浦)에서 학생과 주민들의 반공 궐기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용암포에서는 다른 곳과 같이 공산당이 추진하는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공산당의 각본대로 열렸다.
축하연설을 위해 연단에 올라선 학생대표가, 공산당의 여러 가지 비행(非行)과
소련군정의 압제와 소련군의 행패를 폭로·규탄하는 한편,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사용하고 있는 수산학교(水産學校)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기세를 올리자,
환영대회는 삽시간에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하였다.
당황한 공산당은 보안대를 앞세워 이들을 진압하면서 충돌이 일어나,
반공시위자측에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1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소식은 곧 신의주 학생들에게 알려졌다.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 학생들은 그곳 공산당 당국과 소련군 현지 사령관에게
사건의 온건한 사후처리를 요구하다가 거절되자,
반소·반공을 위한 일대시위(一大示威) 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11월 23일 하오 2시를 기하여 신의주의 모든 중등학교 학생 3,500여 명은
학생대표의 호소문 낭독에 이어 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호소문에서 "공산당은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하여
약탈·강권발동·불법·기만 등 갖은 학정(虐政)을 자행하고 있고,
보안대는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있다.
또한 공산당은 적색제국주의의 침투를 위하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궐기한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공산당과 소련군은 기관총·따발총·권총 등으로 학생들에게 발포하고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기총소사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피살자 23명, 부상자 7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구속되었다.
이들의 궐기를 배후조종하거나 교사(敎唆)하였다는 죄목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민족 진영의 간부 및 종교인들이 체포·구금되었으며
이후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이 신의주 학생 의거는 북한 주민의 반공의식(反共意識)을 대변한 것이며,
1919년의 3·1운동, 1926년의 6·10만세사건,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 등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한국 학생들의 민족적 의기(義氣)와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로부터 2년후 황해도 해주에서는 북한 공산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월남을 하기 위해 밤배를 탄 한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 순시선의 감시망을 피해
칠흙같은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그믐밤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월남을 하려던 민간인들이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김종삼이란 자도 있었다.
김종삼은 나중에 그날에 벌어진 일을 차마 잊을수가 없어서 시로 남긴다.
그의 시에서는 황해도 해주 앞바다에 남한과 북한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그 깊이를 가늠하기 조차 힘든 수심이 깊은 용당포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이 때문에 해상에서 북한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소련제 기관총의 발포 세례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어쩔수 없이
바다속으로 수장시킨 어린 아이에 대한 슬픔의 깊이를 민간인이라는 시로 표현했다.
그것은 용암포라는 곳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인해 숨져간 사람들의
한맺힌 깊은 슬픔처럼 용당포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단 여덟줄의 문장으로 민족 분단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비극적 민간인들의 비애를 처절하게 표현했다.
민간인이라는 제목의 그 시에 스며들어 있는 노스텔지어는
그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자식을 산채로 바다에 던져 희생시킬수 밖에 없었던
그 부모와 그리고 그 부모와 한배를 같이 탔엇던
사람들이 평생 함께 지니고 다녔을 깊은 슬픔을
한번쯤 헤아리게 만든다.
평안도의 용암포와 황해도의 용당포는
두곳 모두 일본의 침략에 의한 결과로 나중에 나라가 두쪽으로 갈려진 이후
또 다시 소련 공산주의와 그 추종 세력에 의한 가혹한
압제에 기인되어 비극적이고도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백령도 심청각에서 바라본 황해도 장연군 - 2015년 5월 24일
민간인(民間人)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황해도 은율 태생의 김종삼 (金宗三.1921~1984) 은 언제나 다친 오리걸음이었다.
40년대초 사설 동경문화학원 시절이나 6.25전후의 폐허 명동 혹은
그의 방송국이 있던 정동언덕에서도 늘 그 걸음이었다.
변할 줄 모르는 이미지, 눌변의 미학. 지식이 아닌 몸의 모더니즘 그런 것이었다.
여기 드물게 삼팔따라지 시절의 한 월남 (越南) 풍경이 생략과 객관으로 그려져 있다.
방에 궤짝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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