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nch Tank

독일군이 노획하여 발칸전선에서 사용했던 프랑스군 H 39 호치키스 경전차 -German capture used French H 39 Hotchikiss Light Tank in the Balkan

슈트름게슈쯔 2017. 10. 19. 16:37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이 노획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0년 




독일군이 노획한 프랑스군의 37mm  SA 18 대전차포 장착  H 39 호치키스 경전차






발칸 지역을 침공해 그리스로 향하는 독일군의 프랑스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1년 








발칸전선에서 파괴된 독일군의 노획 프랑스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1년 




발칸지역의 하천을 도강하는 독일 프린츠 오이겐 산악사단 소속의 프랑스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1년 12월 






유고슬라비아 어느 마을 입구에서 전복되어 버린 독일군의 프랑스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1년 12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시내로 침략해 들어온 독일군의 노획 프랑스제 H 39 호치키스 경전차 -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 초반기였던 1941년 초에 영국은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의 공격에도 견더내고 건재하여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가정했다. 

영국은 발칸 반도의 방어선 중요 부분을 적의 수중에 넘어가기 직전에

 다른 국가가 막아주겠지 하는 안이한 형태로 넘겨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러했던 약점은 영국군이 발칸지역에 투입되었다 해도

독일군을 상대로 방어하기에는 곤란했다. 

독일군은 그러한 약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불가리아 국경의 메탁사스 방어선 정면으로 

독일군 18군단 5산악, 6산악, 72보병사단과 30군단 50사단, 164사단이 공세를 펼치는 사이에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을 관통한 제2기갑사단이 메탁사스 방어선을 우회하여 

그리스 북서부의 중요 항구도시 테살로키나를 함락하고 메탁사스 방어선을 포위해 버렸다. 

결국 메탁사스 방어선의 그리스군 6만여 명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그에 따라 동부전선이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이름만 남아있던 중부전선도 무너졌다.  

1941년 4월 15일에 서부전선만이 전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동부전선이 내륙으로 크게 후퇴하고

 이윽고 그리스-영국 연합군은 비참한 패주를 시작했다. 

아직 영국 공군은 본토방위에도 힘겨워하던 상황이라 그리스 일대의 제공권은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에 넘어가 있었다.,

영국군의 퇴로는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수투카 Ju87 급강하 폭격기및 

Ju 88 폭격기의 폭격으로 인해 살륙 당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빈약한 영국 공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렸다. 

이 전투에는 영국의 유명 작가인 로알드 달도 참여했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 전투를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영국군을 독일군을상대로 정말 처절하게 싸웠다.

아테네에서는 영국 공군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13기로 200여기의 독일 전투기와 맞서 

90여분 동안 독일 전투기 27기를 격추하는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공중전의 강도는 전투기 에이스인 팻 패틀이 이 전투에서 전사할 정도로 격렬했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 지휘부는 작전의 목표를 그리스 방어에서

 영국 원정군의 철수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

 같은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이 

예상치 못한 전면공세에 나서 전선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애당초 그리스 원정군이 많은 규모도 아니기도 했다. 

그처럼 계속되는 패배로 국가방위가 불가능해지고 영국이 철수를 준비하자 

절망감에 빠진 그리스의 새 수상은 4월 18일 권총자살을 했다.  

한편, 서부 알바니아 전선의 주공을 맡은 이탈리아군은 

또 다시 전면공세가 실패로 돌아가 공세계획을 망칠뻔 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한 중동부 전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역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을 가만히 놓아 둘 독일군이 아니었다.  

그리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슈츠슈타펠 아돌프 히틀러 여단이 측

면에서 비스듬히 내려가는 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이에 맞선 그리스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탈리아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독일군이었다.

 이탈리아군 같았으면 포기했을 그리스군의 방어선을 향해 

무모하다시피할 정도로 돌격해 들어오는 독일군의 공세에

 그리스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군은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탈출을 위한 마지막 총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거센 역습으로 좌절이 되자 

서부전선의 그리스군 사령관은 4월 20일 독일군에 항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