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S 펜싱 유니폼 - Reinhard Heydrich's SS fencing Uniform

슈트름게슈쯔 2018. 1. 10. 17:19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SS 펜싱 경기 참가자들 - 1935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1년전 독일 SS 펜싱 경기 우승컵에 참가한 

크르너와 하이드리히와 하인케와 리프셔- 1938년 



하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22년 독일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중위까지 진급했으나 1931년에 모종의 이유로 쫒겨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어떤 한  여성을 임신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이드리히가 훗날 이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약혼녀가 있었음에도 다른 여성과 내연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독일 여성의 명예와 독일 해군 장교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퇴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기준으로는 퇴역처분이 내려지지 않을 사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여성의 아버지가 당시 해군총사령관이던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강제로 퇴역되었던 것이었다.




빌헬름 카나리스(1887~1945)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독일의 해군 제독 빌헬름 카나리스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방첩국이자 정보부였던 

 아프베어의 사령관으로서 연합국에 정보를 주고 받으며 전후 독일의 입장을 관망하던중 

히틀러를 제거시킬 암살 작전을 도모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어 처형당하었다



독일 해군 제독 에리히 레더는 1928년 10월 1일 한스 젠커 상급대장에 이어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므로, 강제 예편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최소한 그  이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은 독일 국방군 정보부 방첩국

아프베어(Abwehr)를 이끌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소장이었다. 

훗날 대장까지 진급한 아프베어의 지휘관 카나리스 제독과
나치당 소속 SD(보안국)를 이끌던 하이드리히는 

정보기관 특유의 충성경쟁 때문에 라이벌 관계가 된다.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카나리스가 히틀러 집권 후에도 계속 아프베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리스가 하이드리히의 석연찮은 전역에 관련된 진상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유대인 가계라는 것을 카나리스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국방군-나치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보부서를 자기 휘하에 

두고싶어했던 하이드리히가 그래서 카나리스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리히 히믈러와의 암투에서 보듯이 하이드리히는 상관이라고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이는 신빙성이 있다. 

 당시 하이드리히는 리나 폰 오스텐(Lina von Osten 1911~1985)이란 

독일 여성과 약혼한 상태였다. 

하급귀족 출신인 리나는 발트 해 연안의 페마른 섬 출신의 마을 학교 교장의 딸로,

엷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리나의 동생 위르겐은 1928년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리나 자신도 나치당 여성단체에 가입했다. 

하이드리히에게는 나치당에서의 길이 이미 다져져 있는 셈이었지만, 

처음에는 나치당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돌격대(SA)의 거친 이미지만 보고 그들을 판단했다. 

그러다가 약혼녀 리나 폰 오스텐은 하이드리히에게 

SS에 입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당시 SS는 히틀러의 친위 경호대로써 약 1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1년 27세의 하이드리히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SS의 대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