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툴롱 항에서 자침한 비시 프랑스 해군 전함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Provence Alpes-Cote-d'Azur succumbed to suicide in the Toulon

슈트름게슈쯔 2018. 2. 5. 17:08
















제 2차 세계대전 중반기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툴롱항에 정박해 있던

 비시 프랑스 해군의 함대를 강제로 접수하기 위해 투입되었지만

 모조리 자침시킨 관계로 함대 강탈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자폭시 발생한 

화재의  매케한 냄새를 맡으며 검은 연기에 휩싸인 전함들을 바라보는 

독일 제 25 기갑사단의 812번과 822번 823번 4호 전차 승무원들   - 1942년 11월 27일





툴롱 항에서 자침시 불타는 비시 프랑스 해군의 전함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1942년 11월 27일 



비시 프랑스 해군 함대의 자살 폭침이었던 툴롱항 자침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2년 11월 27일에 나치 독일이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프랑스 함대를 강탈하려고 하자

 툴롱항에 정박해있던 비시 프랑스 함대가 자침한 사건이었다.  

1942년에 연합군의 횃불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포로로 잡는다. 

다를랑 제독은 연합군에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전함인 리슐리외급 전함을 연합군에게 넘긴다

한편 독일은 더 이상 비시 프랑스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비시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기 위한 안톤 작전을 발동하였으며 동시에

 남은 프랑스 함정들을 접수하기 위하여 라일라 작전을 발동한다.  

1942년 11월 19일에 시행된 라일라 작전은 독일 7 기갑사단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이들은 툴롱으로 진입하여 조병창, 해안 방어시설등을 점령하였고 

프랑스 함대의 탈출을 막기 위해여 기뢰를 부설하였다. 

11월 27일 4시에 독일군은 툴롱으로 진입하였고 이는 프랑스 해군 장교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시 프랑스 해군 함대 사령관이었던 장 드 라보르드제독은 

자침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군함에 접근하는 자는 사살해버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4시 50분에는 조병창에서 독일군은 프랑스 잠수함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이에 프랑스 해군 잠수함들은 자침하기 위하여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5시 40분에 잠수함 카사블랑카는 알제리로 도망친다.

 한편 독일군은 조병창에서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기지로 진입하는것이

 당초 계획보다 늦은 5시 25분에 진입하게 된다. 

독일군이 진입하자 기함 스트라스부르는 전 함대에 자침 명령을 내렸다. 

자침조를 제외한 승무원들은 탈출하였으며 남은 인원들은 해수 밸브를 열고 폭파시켰다.

 일부 독일군은 프랑스 함정에 올라타서 자침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라일라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프랑스 해군은

 그들의 배를 강탈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함 3척, 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을 포함한 77척의 배가 자침하였고 

독일은 전력으로 쓰기도 어려운 작은 배만을 건졌다. 

한편 잠수함 몇척은 자침하는 대신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이후 독일군은 일부 프랑스 해군 순양함들을 건져서 수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연합군의 공습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전함은 기함 스트라스부르, 됭케르크, 프로방스 3척, 

수상기모함 1척, 중급과 경급을 포함한 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 어뢰정 13척, 호위함 (슬르푸 형) 6척, 잠수함 12척, 경비정 9척, 

보조함정 19척, 연습선 1척, 예인선 28척에 프랑스 함대 전력이 

틀롱 앞 바다에 가라앉았고, 항구 크레인도 4개나 파괴됐다.

  이중에 35척은 프랑스가 새로이 만들었던 신형 함선들이며, 

스트라스부르와 됭케르크는 일반 전함보다 더 빠른 속력을 가진 신형 전함이었는데 

모두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자침시킨 것이었다.  

오직 몇몇의 잠수함이 자침을 거부하고 도주했는데, 

그 중 2척은 알제리에 자유 프랑스로 합류했고, 

1척은 중립인 스페인으로 향했다. 

 이외에 수송선 1척도 알제리로 도주했다.  

툴롱 자침으로 인명 피해도 상당했는데 12명의 프랑스 수병이 전사하고

 2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독일군은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다를랑과 연합군은 실망했으며, 드골을 비롯한 자유 프랑스는 

드 라보르드 제독을 비롯한 틀롱의 비시 프랑스 해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드 라보르드 제독은 독일로부터 

큰 책임 없이 풀려나 비시 프랑스 해군부 차관으로 일하였다. 

 프랑스가 해방된 후 재판에 회부된 드 라보르드 제독은 

함대를 연합군에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과 

비시 정부 협력에 대한 죄목을 이유로 1947년 6월에 사형이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량이 점차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더니 1954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드 라보르드 제독은 1977년 7월 30일에 99세의 일기로

 천수를 누리고 지롱드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