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 당시 리지웨이 UN 사령관의 반격 - UN Commander Ridgway Count Attack during the Korean War

슈트름게슈쯔 2020. 5. 9. 14:36








한국 6.25 전쟁 당시 남한을 침략한 후 UN군의 참전으로 세궁 역진되어 쫓긴 북한 인민군을 지원하여 

한반도를 넘어 침략해 들어온 중국 공산군의 한국전 개입에 의해 밀려 버린 1951년 1·4 후퇴로 인해 전세가 

한국과 미군에 어렵게 전개되고 있을 때 UN군 사령관을 맡아 전황을 반전시킨 자는 미국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1950년 12월 지프 충돌 사고로 사망한 월턴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그는 1951년 4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의 뒤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6.25 전쟁을 총지휘했던 것이다.

그가 지휘권을 인수할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2차 공세로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으며, 

유엔군과 한국군 사이에서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또다시 함락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반격을 위한 계획도 없었으며, 단지 부산으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하거나 일본으로 철수하는 비상계획이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장교들을 경질하고, 

식량과 보급품을 개선하는 등 전열 재정비에 착수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전세가 곧 미군에 유리하게 전환될 것으로 확신을 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한반도 북쪽으로 깊숙이 진격한 유엔군이 타격을 입은 것처럼 

남쪽으로 멀리 내려온 중공군과 북한군이 보급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간파하고 

우세한 공군력을 활용해 적의 후방에 맹폭격을 가하는 전략을 펼쳤다. 

 결국 그러한 종합적인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리지웨이 사령관은 한국에 부임한 지 100일도 안 된 

1951년 3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리지웨이 장군의 공이 없었다면 6.25 전쟁 때 한반도가 공산화가 됐을 수도 있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 D.C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리지웨이 장군의 장례식에서 

미국 콜린 파월 합동 참모본부의장은 모든 미국의 군인들은 이 위대한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 6.25 전쟁시 UN군 사령관에 이어 유럽 연합군 사령관과 

미 육군 참모장을 거쳐 1955년 퇴역후 1993년 9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리지웨이 UN 사령관의 반격 - 남한강을 도강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미군 M4A3E8 셔먼 전자들 -1951년 3월 




한국 6.25 전쟁 당시 남한을 침략한 후 UN군에 쫓긴 북한 인민군을 도와서 

만주 즙안에서 집결한 후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이동하여 중부지방으로 침략해 내려온 중국 공산군의 

형세를 살피는 UN군의 정찰 작전이었던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중국 공산군의 정체 확인한 

유엔군은 중국 공산군 제 3차 공세중이었던  1월 12일을 전후하여 원주의 포위 위기를 수습하여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곧 바로 중국 공산군의 공세시기를 예측하는데 이목을 집중하였다. 

유엔군은 중국 공산군이 37도 선상에서 언제 공격해 올 것인지 초조해 하였고 부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그에 따라 슬기로운 지략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전 미 8군의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무작정 중공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은 떨어진  UN군의 사기를 회복할 수가 없음을 바로 인식을 하고 

전선에서 사라진 중국 공산군 부대를 찾아 내기로 결심하였다. 

그에 따라  리지웨이 장군은 정찰부대의 규모를 확대하여 증강된 1개 연대 규모 병력으로 위력 수색을 하여 

중국 공산군의 배치, 규모, 장차의 기도 등을 파악하기로 하고 이를 미 제 1군단에 지시하였다. 

미 제 1군단에서는 예하의 제 25사단 제 27연대를 위력 수색부대로 선정한 후,

 연대에 전차 1개 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배속시키고 그 작전의 명칭을 

제 27연대의 부대 명칭인 사냥개의 명칭인 울프하운드(Wolfhound)라고 명명하였다.

 제 27연대는 1951년 1월 15일 아침에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 - 오산을 연결하는 1번 도로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연대가 오산을 경유하여 16일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 부터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한편 군단장은 수원을 공격하는 제 27연대의 동측 방면을 방호하기 위하여 미 제3 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 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 방향으로 진출시켜 수원-용인 간의 42번 도로를 차단시켰다. 

이들 역시 초기에는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진출할 수 있었으나 수원에 근접하면서 부터 

600~8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공산군 부대가 강력히 저항하여 공격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군단장은 최초 계획한 위력 수색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1월 16일 14:00경에 공격부대를 철수시켰다.

그 작전은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술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그 당시 중국 공산군의 방어선이 수원 - 이천을 연하는 선이며,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한 점과 중국 공산군이 가까운 시일에 

대규모의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작전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전장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장차 작전에 유리 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부대 규모는 

소규모 단위인 연대 규모의 부대로도 가능 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유엔군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미군의 한반도 철군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즉,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은 1월 15일 전선을 시찰하였다. 

그 시찰의 목적은 미군의 한반도 철군과 관련된 미국의 정책을 전선 사령관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린스 대장이 전선에 방문한 동일한 날짜에 실시한 울프하운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월 17일 콜린스 대장은 리지웨이 중장으로부터 “중국 공산군의 주력은 아직까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군의 보급과 사기에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동부지역에서 북한군의 침투공격이 차단되었다” 등의 전선 상황을 보고 받고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에 대해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 6.25 전쟁이 휴전된  콜린스 대장은 저서「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 혼자였다”고 하면서 

미군의 한반도 철군문제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리지웨이 장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결국 울프하운드 작전은 불과 1개 연대의 병력으로 이틀간에 걸쳐 실시된 소규모의 위력수색이었지만, 

그 작전으로 이제까지 베일에 쌓인듯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국 공산군의 정체와 취약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유엔군은 중국 공산군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세를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부대의 사기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한국 6.25 전쟁중 북한 인민군을 도와서 한반도 남쪽으로 침략해 내려와 수세에 몰린 

UN군이 중국 공산군대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계획한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반격한 유엔군은 울프하운드 작전의 성공을 전과 확대하여 한강선까지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한 단계 높은 위력 수색을 1월 25일부터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는 오산과 여주를 연하는 서부지역에서 한강 까지 5개 구역으로 나누어 통제선을 설정하고

 미 제 1군단과 제 9군단이 각각 1개 사단을 앞세워 통제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작전의 명칭은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게 실시한다' 라는 의미로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 즉 번개작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리지웨이 장군은 패트리지(E. E. Partridge) 제 5공군 사령관이 

조종하는 훈련기로 정찰을 하였으나 중국 공산군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유엔군은 한강선까지 진출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1951년 1월 25일 07:30경에 미 제 1군단은 제 25사단을, 제 9군단은 

제 1기병사단을 선두에 배치시켜 오산 - 여주를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적은 오산, 수원, 이천 등에서는 저항했으나 예상보다는 경미하여 유엔군은 계속 진출할 수 있었다. 

그에 자신감이 생긴 리지웨이 장군은 1월 31일에 안양-양평을 연하는 선에 도달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게 “주력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라!”라고 명령하였다.

콜린스 대장의 방한 중에 이루어진 울프하운드 작전은 “중국 공산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장군의 확고한 신념이 미국의 철군정책을 해결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에 따라 각 군단에서 1개 사단만을 전방에 운용하는 전투정찰 방 침을 바꿔 1월 31일부터는

 각 군단의 주력을 전방에 투입하여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으로 전환하여 수원 - 신갈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자, 

앞으로 한강을 향해 계속 진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수리산과 관악산이었다. 

첫째, 수리산 점령을 위하여, 제8군의 서측 공격부대인 

미 제25사단은 1월 27일에 수리산 하단의 안산-군포를 연하는 선에 도달하여

 1월 31일 아침에 수리산의 서측 능선을 터키 여단이, 동측 능선을 제 35연대가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수리산을 방어하는 중국 공산군은 제 150사단 예하의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수리산 정상인 475고지와 인접의 440고지를 중심으로 엄체호를 구축하였다. 

미군은 2월 2일 수리산 정상 475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중국 공산군은 야간에 터키여단이 점령하지 못한 

440고지 방향에서 역습을 한 차례 실시한 후 공격을 멈추고 도주하였다. 

둘째, 관악산 점령을 위하여, 국군 제1사단 제 15연대가 2월 9일 과천 방향에서 관악산을 공격하자, 

중공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그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10:00경에 관악산을 점령하고 2월 10일에 영등포 - 노량진 선으로 진출하여

 가장 먼저 한강선에 도착한 미 제 3사단과 연결하였다. 

그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후 1개월 만에 한강 남쪽에서 다시 수도 서울을 바라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