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사마천 사기[史記]의 왜곡된 역사 논리를 뒤집은 니꼴라 디 코스모[Nicola di Cosmo disprove Ssu ma Chien's Grand Historian of China Shiji ]

슈트름게슈쯔 2009. 11. 16. 11:32

 

 

 고대 스키타이 유목민족의 분포지역

 

 

스키타이 전사의 공예품 [Scythian Soldier,s Artefacts]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인의 최고 걸작품中의 하나인 금제 사슴 모양의 방패 장식판 -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나무아래 쉬고있는 전사의 형상으로 제작한 기원전 5세기 사카인(스키타이인)의 주조금판 -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재

 

 

 

                   멧돼지를 쫓는 사냥꾼의 모습을 담은 기원전 5세기에 제작한 금과 청색 유리 산호로 제작한 사카인의 주조 금판

 

 

 

  네이멍구 자치구 아루차이덩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머리 장식

 

 

 

 


드네프르강 유역 스키타이인의 무덤에서 발굴된 기원전 4세기경의 금제 말머리 장식

 

 

 

흉노제국의 판도 (Hsiung nu Empire Map)

 

 

 

위룽타이에서 출토된 어린 사자 모양의 투겁

 

 

 

     양머리 모양의 장대 투겁

 

 

 

말모양의 장대 투겁

 

 

 

한(漢)나라와 흉노


 

 

사자모양의 금제 방패 장식판

 

 

 

기원전 7세기경 스키타이인의 사자 문양의 순금제 방패 장식판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인의 장신구

 

 

 

은제 술잔

 

 

 

스키타이인의 순금제 항아리

 

 

 

BC 400~350 년경 스카타이인의 금제 항아리

 

 

 

스키타이인의 금제 허리띠 장신구

 


 

스키타이 전사가 묘사된 순금제  머리핀

 

 

 

BC 200년경의 아시아 국가 지도

 

 

 

 

스키타이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 니콜라 디 코스모의 [오랑캐의 탄생]

 

 

 

니꼴라 디 코스모 (Nicola di Cosmo)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재직중인 니콜라 디 코스모 교수는

그의 저서 오랑캐의 탄생에서 호전적이고 미개한 야만인들로 알려져온

중국 북방의 유목민들이 실제로는 독자적인 금속기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한(漢)나라와 맞먹는 세력으로 성장한 유목민들을 무질서한 야만인들로

 인식하는 전통이 동양 역사서의 기본인 사기(史記)에서 비롯 되었음을 밝혀냈다.

융적,호,또는 흉노등의 이름으로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목민들은

일찌기 앞선 기마술과 금속기 문화를 토대로 유라시아를 지배 하였다.

그들은 중국에 기마전술을 전해 주었을뿐 아니라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제국을 형성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등 아시아 고대사의 한축으로 왕성하게 활동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출현한 흉노 유목제국은 치자문화,주커이거우 문화,샤자덴 문화등

중원 문화권과 확연히 구분되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들 문화권에서 소유자의 사회적지위를 상징하는 장신구와 무기들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유목민들이 전사 귀족의 지배를 받는 계급 사회를 형성하였음을 입증한다.

그뿐 아니라 상(商)나라 시대의 중국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물 양식 공예품들은

 이들이 당시에 이미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목민들이 처음 중국 역사서에 등장한 때는 바로 주(周)나라 제후국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영역을 넓혀가던 전국시대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유목민들과 중국인들의 접촉지대였던 변경을 정복해야할 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중국 군대에 맞서 대항하는 유목민들은 자연히 중국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겼다.

 즉 지배당하고 교화 되어야할 야만인들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순히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던 오랑캐를 중국 역사의 구성 요소로서

본격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역사서가 바로 사기[史記]였다.

사마천은 전시대의 사료를 집대성하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조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이해하는것을 사기[史記]의 집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고자 오랑캐의땅으로 여기던 변경까지

중국사의 영역에 포함하여 통일된 하나의 세계를 서술하고자 하였다.

당시 여러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라와 가장 치열하게 대적하던 이들은 바로 흉노족이었으며

사마천이 보기에 그들은 통일된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장애물같은 존재였다.

사마천이 [흉노열전]을 집필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흉노를 처음부터

중국적 세계 질서에 종속된 존재로 탈바꿈 시키려는 의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마천이 흉노를 오랑캐로 만드는데 사용한 지배서사는 천인상관설 이었다.

이에 따르면 천체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지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고

하늘의 별들은 저마다 땅의 각지역을 관장한다고 한다.

흉노열전에 묘사된 흉노의 땅을 관장하는 별은 전쟁과 재앙을 상징하는 형혹(熒惑) 화성이었다.

이로써 흉노는 음습하고 불길한 땅에 사는 호전적인 야만인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고 말았고

사기[史記]가 역대 중국 왕조사의 전범(典範)이자  동양 역사서의 기본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러한 이미지는 한자 문화권 전반으로 퍼져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국사의 범위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범주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고대사를 서술한다.

최근 문제가 된 고구려사 논쟁 또한 이러한 원칙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난하고 중화중의의 대두를 경계하지만

유목민에 관한한 우리도 중화사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즉 이제까지 어처구니 없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콩깍지 씌인채 흉노 = 오랑캐로 보아왔던 것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한(韓)민족도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변방에 위치한

오랑캐에 불과한데도 긴 세월 동안 중화사관에 지배를 당한 탓에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게 된것이다.

사마천이 기술한 오랜 역사서인 사기에서 보듯이 고대 중국인들의 관점은

그들 민족외에 여타 다른 주변 민족들은 예외없이 오랑캐로 서술된 것을 볼수있다.

즉 자기들만 세상에서 제일 잘 났다는 논리인 것이다.

중국에 제일 위협적인 세력이었던 유목민 민족을 흉노라고 했는데

흉노(匈奴)란 글뜻을 풀이하면 문자 그대로 오랑캐 종놈를 의미한다.

흉노라고 그들에게 그러한 이름을 명명시킨 시점부터 그들이 그 이름을 달갑게 여기거나

 좋아했을리는 없고 중국에게 속으로 이빨을 갈며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나 현재나 세계사를 논하는 객관적인 시점에서는 중국인이 바라본

오랑캐의 관점은 그들만의 세계관일뿐 주변 민족들의 역사 또한 엄연한 세계사의 한 부분이요

 결코 오랑캐란 존재하지 않는 중국만의 아집에 의한 역사적 기록임을 알수있다.

그들이 지칭했던 오랑캐란 소위 융적(戎荻),호(胡),흉노(匈奴)등으로 불리워지고 기록되었다.

그러한 흉노로 잘 알려진 유라시아의 스키타인인은 중국의 경우처럼 문자화된

역사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곳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당시 상당히 발달된 그들의 문화 수준을 엿볼수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주 무대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및 흑해연변에서

페르시아 북부와 신쟝에 이르는 방대한 유라시아 지역이었다.

시베리안 스키 또는 스키타이로 잘 알려진 이 유목민족의 유물들은

2차 세계대전이 바로 끝난 직후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예니세이강 유역 주변에서 대거 발굴된바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토한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오랑캐로 불려졌던 이 스키타이인들은 농사보다는 목축을 중시하는

 유목 민족 이었기에 기미술과 야금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러한 스키타이인에게 중국인들 또한 기마술을 배웠으며

수세게에 걸쳐 어쩔수 없이 맞닿은 지리적인 여건하에서 그들과 숙명적인 대립을 겪어야 했다.

유라시아 일대에서 강성했던 세력을 지녔던 흉노와의 싸움에서 한나라는 원거리에서 말을 타고

화살을 날리며 돌진해 오는 흉노의 기마병을 상대로 정면 공격을 하다가는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 당시 한때 그들에게 포위 당하여 흉노족 왕에게

유방의 딸을 볼모로 보내어 굴욕적인 혼례를 치르게 한 후에 풀려날수 있기도 했다.

북위의 조조가 지적했듯이 이들을 격퇴 시킬려면 중국인이 흉노보다 더 나은 강점을 지녔던

장창과 방패로 무장된 조련된 대군의 무리로 적을 끌여들여

세뇌를 발사하면서 체계적인 전투를 펼쳐야 이들을 물리칠수 있었다.

또한 중국을 처음 통일 했던 진나라의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아

이들의 침입에 성곽전으로 대응한것 또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흉노의 역사를 아시아의 고대사에서 중국인의 사관에 맞게

오랑캐로 지칭하고 세계사를 논한다는 것은 올바른역사적 잣대가 아닌 것이다.

무기를 제작하던 주체였던 스키타이의 야금술은 페르시아로 전파되어

그들보다 한층 발전된 여러가지 금속을 제련시키던 연금술을 통하여 페르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스키타이의 야금술은 이슬람 문명에 이르러 세밀한 금속공예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 시간대가 흐른후에 아이러니하게 북방의 흉노및

몽골제국은 수확기가 끝난 가을철에 남쪽의 이슬람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여 노략질을 해갔었다.

침략의 제일 큰 목적은 전리품 획득 이었던바 그들의 첫번째 노략질 목표는

바로 이슬람의 정교했던 금속 공예품과 금속제 그릇들이었던 것이다.

 

    

 

 

      photo from : ias.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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