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 와타나베 켄 / 니노미야 카즈나리 / 나카무라 시도우
상영시간 : 142 분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미드 ‘퍼시픽’에서는 미군 관점의 이오지마 전투를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의 관점이다.
‘퍼시픽’이 주로 사병의 관점이었다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사병인 ‘사이고’와 지휘관인 ‘쿠리바야시’ 중장 두 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유황도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에 대일본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으며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
영화는 군인들의 영웅적인 활약상이 아닌 전쟁의 폐해와 참전군인들의 심리적 공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전쟁의 참혹성, 참전군인들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했으나 이 영화처럼 처절하게 표현한 영화는 보지 못했다.
일본군 장교는 후퇴한 병사를 참수하려 하고,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덴노 헤이까를 외치며 집단자살하고, 미군은 항복한 일본군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던 일본군 장교는 돌격하는척하다 죽은척해서 살아남는다.
영화는 일본군이 수세에 이르자 항복하지 않고 수류탄을 껴안고 자살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미국인 감독이 일본군의 비인간성, 무모함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려 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영화는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할 때는 흑백영화이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이나 사이고의 과거 기억과 21세기 현재는 컬러(마땅한 표현이...)로 표현되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지루하다는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지루해도 끝까지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영화이다.
<쿠리바야시 장군 역할의 와타나베 켄>
와타나베 겐,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그를 처음 봤었다.
사무라이 리더 역활로나온 영화였는데 톰크루즈와 영어로 동양의 정신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나 사무라이 특유의 몸짓(칼)을 봤을 때, 와, 매력적인 배우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근데 보면 볼 수록 아, 뭔가 있어보이는데 뭐지... 하다, 영화 중후반에 마을 축제행사때 그가 무대위에서
혼자 광대 표정을 지으며 연극을 하는 장면을 보고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1시간 30분 동안 리더로서의 근엄함을(얼굴 표정) 잃지 않았던 그가 광대 표정을 보인것은 불과 1초 정도.
비극을 아는 자만이 희극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나.
그 짧은 시간에 와타나베 라는 배우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쫘악 하고 느껴 졌다.
아직 우리나라엔 이런 배우는 없다.
송강호와 최민식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들도 훌룡하지만 멘탈적인 부분에선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 부분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우위에 대한 확대 해석은 아니다.)
와타나베가 최근에 나온 리셉션이나 기타 헐리웃 영화에 출연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병헌이 한, 5배쯤 업그래이드 되면 와타나베와 같은 느낌의 배우가 될 확률이.. 그래도 한국 배우중에선 높다.
아직 젊으니까.
그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그해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됐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과 와타나베 켄
<수류탄 끌어안고 자살하는 일본군>
<수류탄 자살 후 잘려나간 손목과 가족사진>
<후퇴한 병사를 죽이려는 일본군 장교>
<미군에게 항복했지만 미군에게 살해당하는 일본군 포로>
<죽은척하고 살아남은 일본군 장교>
<사이고의 민간인 시절>
1944년 6월 수세에 몰린 일본군 요충지 이오지마에 대한 미군의 상륙 작전이 감행되기 직전
부임한 사령관 쿠리바야시(와타나베 켄 분)는 부하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생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제빵사 출신의 일병 사이고(니노미야 카즈나리 분)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아내와 얼굴도 보지 못한 딸을 위해 편지를 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6년 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이오지마 전투를 묘사했다.
두 작품 모두 과거 회상의 형식의 액자 구성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아버지의 깃발이 미군의 관점에서 본 이오지마 전투를 묘사하는 반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철저히 일본군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일본군의 전멸로 이오지마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극중의 일본군 병사들의 생존 가능성은 전무하며
적에게 죽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동료에게 살해당하는 세 가지 수단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한다.
전쟁 영화가 설득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큰 스케일과 박력 넘치는 전투 장면이 우선시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요구된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군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엇비슷한 군복을 입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다면
전쟁 영화는 자칫 지루한 스펙터클을 나열하거나 영웅적인 무용담을 선전하는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호화 캐스팅을 통해 일본군의 다양한 군상을 포착한다.
쿠리바야시와 사이고를 각각 중심으로 일본군 장교와 병사의 두 계급으로 서사가 구분되는데,
쿠리바야시를 지지하는 니시(이하라 츠요시 분)를 비롯한 일련의 장교들과
배격하는 이토(나카무라 시도우 분)를 비롯한 한 무리의 장교들이 갈등을 형성한다.
실존 인물인 쿠리바야시와 니시는 미국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자 육군 장교이지만 이토는 미국을 혐오하며 해군 장교라는 차이점도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절감하고 있는 군기 빠진 사이고와 헌병 출신으로 군기가 바짝 든 상병 시미즈(카세 료 분)도 미묘하게 서로를 의식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신념으로 무장해 화해할 줄 모르는 고루한 장교들과 달리 병사들은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다.
명령권자인 쿠리바야시와 말단에서 이행하는 사이고는 수시로 교차하며
각각의 서사의 축을 이루는 두 주인공의 편지를 통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전개된다.
일본에서 출판된 바 있는 쿠리바야시의 서간집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영화화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일본 영화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더 쉽게 출연작을 접할 수 있는
와타나베 켄이 영어에 대한 부담을 털고 모국어인 일본어로 연기하는 모습은 퍽 자연스럽다.
헐리우드 배우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은 와타나베 켄이 미국의 일본 대사관 주재무관 출신의
미국 문화에도 친숙한 일본군 장성으로 분한 것은 당연한 캐스팅이면서도 흥미롭다.
부하를 아끼는 합리적 인물인 쿠리바야시의 사무라이와 같은 비극적 최후는
와타나베 켄의 첫 번째 헐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
엘리트 장교 쿠리바야시와 대비되는 사이고 역의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큰 눈의 동안이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작은 체구로 인해 왜소한 일본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보인다.
사이고는 무의미한 전쟁에 강제로 끌려나온 평범한 민간인 출신의 의무병을 대변한다.
따라서 애국심이나 사명감이 결여된 주인공 사이고의 시선을 통해 일본군의 ‘장렬한 옥쇄’는 광기의 산물로 묘사된다.
사이고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일몰은 일본의 패배, 즉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헌병 출신이라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동료들의 죽음으로 사이고와 가까워지는 시미즈는 가장 어이없는 최후를 맞는 인물이다.
역시 왜소한 체구이지만 진지함을 잃지 않는 이미지의 카세 료에게는 적역이 아닐 수 없었다.
시미즈가 이오지마로 좌천된 이유는 설명되지만,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암시하는 복대의 출처에 관한 에피소드가 누락된 것은 아쉽다.
니시와 이토는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니시는 부하들을 아끼며 미군 포로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접한다.
미군 포로 샘(루카스 엘리엇 분)과 대화를 나누며 위생병에게 치료를 지시하는 니시는
일본군 포로를 감시하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미군 병사와 대조를 이룬다.
니시가 샘의 어머니의 편지를 번역하여 병사들에게 읽어주는 장면은 시미즈의 대사처럼
미군 역시 일본군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입증한다.
반면 이토는 부하들에게 군기를 강요하고 전차를 탈취하겠다며 지뢰를 몸에 두른 채 돌격하는 극히 일본적인 장교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니시는 극히 일본적인 방식으로 자결하며 이토는 비겁하게 전선을 이탈해 포로가 되어 생존하게 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진귀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의 대부분은 연합군과 나치가 대결한 유럽 전선을 묘사하며
미군과 일본군의 태평양 전쟁을 묘사한 작품은 드물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을 다뤄도 일본군은 ‘괴물’로 타자화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인들이 직접 출연해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드문 영화이다.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독일에 비하면 과거사 청산과 반성에 극히 인색했던 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같은 작품이 일본인 감독이 아닌
미국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연출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할것이다.
함께 연출된 두 작품을 굳이 비교한다면 아버지의 깃발보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일본군이 자초한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어리석고도 무모한 전쟁이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군 병사들의 목숨을 초개로 여긴 지휘부와 죽지 못해 안달한 장교들의
모습을 통해 얼마나 일본군이 야만적인 집단이었는지 일깨우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왜 이오지마의 비극이 일어났는지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며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타국을 침략하며 양민을 학살하다 자신들끼리 죽이고
자살한 더러운 과거와 그 근본 원인을 망각하고 오로지 원폭에 대한 기억만을 떠올리며 스스로 피해자인 양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이 이처럼 일천한 유아적 수준에 머문다면 동일한 비극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만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관람하고 일본 군국주의 미화, 비장한 사무라이 자결 문화 예찬,
혹은 일본군을 피해자로 묘사한 것으로 수용한다면 영화를 정반대로 오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국내에 개봉조차 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깝다.
국내에 DVD가 정식 발매되었지만 영화 본편의 자막은 일본어 대사를 영어로 옮긴 것을
한글로 중역을 했는지 의역과 누락으로 가득하다. 일본어 특유의 어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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