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도올 김용옥 어록

슈트름게슈쯔 2011. 10. 3. 13:13

인생이란 “할아버지 그림 그리기.” 인생이란 곧 자기가 늙어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의 자화상을 그려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늙으면 원시가 된다. 원시란 무엇인가?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이제 그만 보고 살라는 것이다. 멀리보고 멀리 생각하라는 것이다.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 너무 많은 소소한 것들을 들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늙으면 기억력이 감퇴된다. 나에게 상처로 남는 모든 마음을 가지고 허허 웃는 큰 인격체가 되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공자

인간은 복합적 감정의 동물이다. 인간의 행위는 반드시 의식이라고 하는 느낌의 고등적 단계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것은 반드시 시간적 인과 속에서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또 동시에 과거로부터의 축적은 반드시 미래 속에 투사되어 있다. 미래가 없는 현재는 존재할 수가 없다.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이행하는 과정의 찰나를 의미할 뿐이다. 미래는 경험된 적이 없지만 항상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을 이해할 때 현재라는 한 시점의 단절적 이해는 오류를 수반하기 쉽다. 반드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전관하는 습관을 길러야만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성립할 수 있다. -도올 김용옥

지식이란 인간의 인식의 지평의 확대범위의 다소만으로 그 기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개념적 지식의 다소에 의하여 유지와 무지의 가치기준이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다. 무지한 인간에게서도 우리는 매우 심오한 인간의 지혜나 인간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고전은 힘이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며 문화적 활동(活動)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지배하는 힘이다. 고전의 힘은 감동(感動)이다. -도올 김용옥

고전에 대해서 우리는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여기서 “함부로”라는 뜻은 “자의적”이라는 뜻이며,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언론은 자유를 특성으로 삼는다. 그러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자유는 죽음이요 허구다. 자유로운 고전풀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자유를 구속하는 기존의 주석에 대한 치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도올 김용옥

인(仁)은 감정이 메말라버린 이지적 도덕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좋아하고 싫어할 줄 아는 풍부한 감정의 세계 속에서 상황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심미적 감수성이다. -도올 김용옥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강렬한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공상의 여백이 있다. 공상의 여백이 없으면 이상주의자들은 모두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현실은 결코 이상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신(神)은 이 우주를 디자인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의 디자이너가 아니다. 신을 “디자이너”라는 명사적 실체로서 파악하는 모든 이해방식이 대부분의 서양종교전통의 미신적 유치성의 본원을 형성한다. 신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는 단지 디자인하고 있는 어떤 부사적 상태이다. 신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氣)의 양태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태란 구체성의 형식이다. -도올 김용옥

이 우주에 관한 궁극적 사실은 우주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존재는 기라는 현실태와의 과련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기가 아닌 존재는 없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나 언어도 모두 기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기 이외의 초월적인 계기의 도입이 없이 기 자체만으로 우주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곧 나의 기철학이다. 우주는 우주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선주철학자(先奏哲學者)들로부터 우리나라 조선조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통된 생각의 기저였다. -도올 김용옥

디자인은 크게 자연의 디자인과 문명의 디자인으로 대별할 수 있지만, 양자는 결코 대적적인 관계에 있지도 않으며 또 이원적으로 나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명의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디자인속에 포섭되는 것이다. 자연의 디자인이란 “스스로 그러함”이다. -도올 김용옥

개미가 집을 짓는 것이나, 사람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 모두 같은 기의 어울림의 현상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문명의 디자인은 항상 의식과 언어라는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에러의 폭이 크다. 어울림이 고도화될수록 “스스로 그러함”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폭이 커진다. 그러나 문명의 에로스도 궁극적으로 자연의 에로스 속에 들어있다. -도올 김용옥

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디자인하는 자는 동시에 디자인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디자이너의 궁극적 가치는 디자인하지 않음에 있다. 디자인은 “만듦”이 아니라 “생김”이다.

저절로 생김이야말로 어울림의 최종의 의미일 것이다. -도올 김용옥

우주(宇宙)는 우(宇)요 주(宙)다.

우는 공간이요, 주는 시간이다.

우와 주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우라는 공간과 주라는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속에 기(氣)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주와 기는 선후를 가릴 수 없다.

그러나 시공간은 기로 인하여 현현되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체계일 따름이다.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의 취(聚)·산(散)의 방식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을 따름이다.

 디자인이란 기의 취산의 배열에 따른 시공간의 배열이다. -도올 김용옥

기(氣)는 어울림이다. 어울림이란 이접적인 다자로부터 연접적인 일자(一者)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어울림에는 반드시 “새로움”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새로움의 요소가 없을 때는 그것은 어울림이 아닌 단순한 반복이요 지속이다. -도올 김용옥

디자인은 어울림의 모든 단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의식 이후의 사태에 하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디자인은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언어적 현상의 디자인이지만, 인간의 의식은 매우 부정적인 편협한 것이며 에러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풀 한포기라는 기의 사회에 있어서, 의식은 말할 수 없어도 디자인은 말하여 질 수 있다. 디자인은 기(氣)가 이(理)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교섭의 방식이다. 그것은 의식의 상태에까지 진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도올 김용옥

라이트나 설리반이 말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의 오류적 성격은 형태가 기능에 종속된다는 주장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생각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정당하다. 자연에 있어서는 스스로 그러한 기능을 형태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는 기의 사회의 내재적 기능의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형태와 기능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인 출입(出入)관계에 있다. 그것은 동시적으로 호상적으로 교섭한다. 스스로 그러한 것은 조작하지 않으며, 장식하지 않으며, 꾸미지 않는다. 자연의 기능은 장식하지 않는다. 기능주의가 인위적 장식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는 그 보편적 의의가 존중되어야 한다. -도올 김용옥

기능은 생명이다. 기능은 생명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기능은 기의 어울림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기능은 디자인이다. 기능은 디자인하고 디자인되어진다. 기능은 신적(神的)이다. 기능은 기(氣)와 이(理)를 매개한다. 기(氣)의 기능은 이(理)를 기(氣)로 진입시킨다. 기능은 협애한 목적성의 기계적 속성이 아니다. 기능은 생명의 만족을 달성시키는 과정이다. 기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심미적 텔로스(telos)를 배제할 수 없다. 기능은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기능은 삶의 질서이다. 기능이 진정으로 생명적일 때, 그것은 장식하지 않는다. 조작하지 않는다. 나뭇잎파리 하나의 기능도 불필요한 장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다! -도올 김용옥

아름다움은 체험의 요소간에 호상적 적응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적응이라는 것은 반드시 목적을 전제로 한다.

이 목적은 소극적 차원에서는 체험의 요소간의 배타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적극적 차원에서는 체험의 요소간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비의 도입이다.

그러나 배타가 완전히 배제된 미(美)는 죽음으로 가는 완성이다.

심미적 파괴는 심미적 건설의 끊임없는 계기이다.

삶이란 기(氣)의 어울림 간의 배타의 정도가 조화의 정도보다 억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배타와 조화는 역동적 관계에 있다. 아름다움은 완전을 지향하지만 완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成)의 순간은 곧 패(敗)이다.

모든 완성은 부패다.

그러므로 더 높은 이상을 향한 불완전은 완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善)에 대한 악(惡)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惡)은 오(惡)의 느낌일 뿐이며, 그것은 부조화의 느낌일 뿐이다. 악(惡)은 추(醜)일 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의 한 계기일 뿐이다. 모든 윤리적 가치는 심미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윤리적 선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이 우주는 윤리적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아름다움이 배제된다면, 진리도 좋고 나쁨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진리는 오로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진리가 없으면 아름다움은 저차원적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는 사소할 수밖에 없다. 진·선·미, 이 문명의 3대요소 중에서 선은 모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모험은 조화에 대한 부조화의 도입이다. 부조화는 새로운 조화의 계기이다. 모든 완성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완전히 가능할 수 있다. 완전의 달성은 곧 그 완전이 새로운 불완전의 한 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은 끊임없는 과정속에 있는 일시적 상태일 뿐이다. 완전은 아름다움의 포용적 단계에 따라 하이어라키칼(hierarchical)하다. 저등한 완전이 있는가 하면 고등한 완전이 있다. 고등한 형태를 지향하는 불완전은 저등한 완전보다 더 고등하다. 진보는 부조화의 느낌의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단지 부조화를 생산키 위한 방편이다. 완전은 끊임없이 완전을 넘어선다. -도올 김용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