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타키투스와 히틀러의 게르마니아[Tacitus & Hitler's Germania]

슈트름게슈쯔 2012. 1. 13. 19:21

1,타키투스 - 게르마니아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년 ~117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서기 55년경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지역에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키투스가 태어난 시기는 네로가 서기 54년 황제로 등극한 바로 직후였다.

타키투스는 청년시절 철저한 기초교육을 받고 난 후 수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 로마인은 정치가로 활동하려면 연설을 잘 해야 했는데

 타키투스는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명성 높은 연설가가 되었다.

네로 황제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폭정은 또 한번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을 탄압하여 자신의 전세 세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당시 이것은 타키투스와 같은 지식인에게 엄청난 박해였다.

도미티아누스 서거 후, 그 때까지 연설가와 변호인으로 알려진

타키투스는 작가로서 활동을 뒤늦게 시작하였다.

마침내 진보적인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 와서야 사유와 언론이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그의 저서『역사』와『연대기』가 쓰여졌다.

그는 저서를 통해 과거의 탄압을 신랄하게 고발하였고, 당대의 도덕적인 타락을 비판하였다.

 이 시대 말의 정신사적인 입장에서 그는『게르마니아』를 저술하게 되었다.

이 저술의 원래 동기는 단순하였으며,

로마인들에게 새로운 종족인 게르만족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타키투스(55~120)는 네르바(재위96~98)에서 트라야누스(재위98~117)로

 황제가 바뀌던 97~98년(42~43세)에 89년 벨기카 갈리아 속주의 군단장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게르마니아'를 집필했다. 

로마의 계속되는 게르마니아 원정의 목표는 갈리아 지역 정복을 완료한 후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 게르마니아 지역까지 정복함으로써

경계선을 공고히 구축하려는 의도와 함께 로마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 다르게 로마의 게르마니아 원정사는 피로 물들어 있다.


B.C.113년 집정관 카르보는 노레이아에서 대패해 추방당한 후 자살했다.

 B.C.107년 집정관 카시우스는 제네바 호반에서 싸우다 전사했고 전군이 포로가 되었다.

B.C.105년 집정관 카이피오, 아우렐리우스, 말리우스는 아라우시오에서 대패해 12만 명이 사망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사로잡혀 보이오릭스에게 살해당했고, 카이피오는 귀환했지만 유죄를 선고받아 처형당했고,

 말리우스는 두 명의 자식을 잃고 유죄판결을 받은 후 망명했다.

9년 바루스는 테우토부르크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3개군단(18,000명)과 함께 전멸당했다.

물론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가

그 본토에서 그들을 패배시키도 했지만, 로마군도 많은 타격을 입었으니 온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게르마니아가 강한 이유에 대해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고

  타키투스도 이러한 관심을 충족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그는 부와 향락에 물들어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로마를 금전에 물들지 않고

용맹하고 자연에 순응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여러 게르만 부족들과 비교하면서 로마의 현재를 고발했다.

게르마니아는 게르마니아의 기원, 영토, 습속, 여러 부족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게르마니아인이 어떤 부족과도 닮지 않은 순수한 혈통이라는 부분에서는

 히틀러의 아리아인 찬양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여러 유럽 지역의 기원이 되는 부족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서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수에비족, 고토네스족(고트족), 랑고르바디족,

 보헤미아의 기원이 되는 보이족, 에스토니아의 기원이 되는 아이스티족,

스웨덴의 기원이 되는 수이오네스족 등이 그들이다.


대체 게르마니아인들이 로마만큼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의 군대는 가족이나 씨족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부모, 여자,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며 한탄하거나 응원하는 가운데서 싸웠기 때문에

가장 용감한 군대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군대를 만들면

서로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용감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게르마니아의 군대가 바로 그런 군대였으며 로마는 그들을 끝까지 굴복시킬 수 없었다.

 

 

 

 

 

2,히틀러 - 게르마니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

 

 

 

 

HOI2DD DMP Mod pack에 포함되어 있는 추축국 승리 화면

 

Welthauptstadt (=World Capital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는 아돌프 히틀러가 구상했던

베를린의 개조 계획으로 2차대전에서의 승리 후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대규모 프로젝트에 붙여진 이름이다.

건축가이며 나찌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재건 계획의 많은 부분을 구상하였으며 그 중에 일부만이 실현되었다.

사실, 게르마니아 그 자체의 공식적인 장소는 최종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몇가지 예상안만이 존재했다.

거대한 도시의 기본 축선건설 계획에는 Unter den Linden의 증축과 중심부에

제국의회를 대체하는 것과 Siegessaule 등의 재배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Gross Halle(=Great Dome=대형 돔) 건설은 전쟁으로 인하여 상당부분 연기되었다.

 

 

 

Unter den Linden(=Under the Linden=Linden나무 거리=피나무 거리) 베를린 시가 중심에 자리한 도로.

 

 

 

 

Siegessaule(1864년 덴마크-프러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조하기 시작한 조각상,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 보불전쟁의 승리도 함께 상징하고 있다.)

 

 

 

 

Reichstag(제국의회, 현 독일연방의회)

 

이 계획의 일부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이 첫단계에서 건설되었다.

슈페어는 이 외에도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정확히 두배로 증가시킨 새로운 Chancellery(집무실)을 계획하였다.

히틀러는 보다 큰 세번째 집무실을 건조하기를 원했으나

결코 이루어진 일은 없었고 두번째 건물은 1945년, 소련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Albert Speer가 건축한 총통 집무실

 

계획되었던 다른 건물들의 대부분은 베를린에 건설을 시작하지도 못했지만 기본적인 계획은 잡혀 있었다.

베를린은 중심부의 4.8~7km에 이르는 대로를 중심으로 재편될 계획이었다.

슈페어는 이 대로의 북쪽 끝에 터무니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돔형 건축물을 계획하였으며

이를 Volkshalle (=people's hall=시민의 홀)로 불렀다.

이 건축물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판테온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돔형 건물은 비실용적일 정도로 거대하여 높이 200m이상에 반지름 250m에 달하는 것으로,

성 베드로 성당 돔 구조물 크기의 6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남쪽 끝부분에는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대형 아치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물론, 몇배나 더 커야 했다.

높이는 수백미터에 달하고 개선문 자체가 새로 건축될 건물의 입구에 들어갈 정도였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공사는 중요한 전략자원의 부족으로 무기한 지연되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Schwerbelastungskorper (=Heavy load-bearing body=초중량내구체)라는 이름의,

 지반공사뿐이며, 이 지반들은 그 위에 건조될 터무니 없는

크기의 건조물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지반이 강해야 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건조물이다.

 

로버트 해리스는 히틀러와 슈페어의 꿈이 1964년에 실현되었다는 가정하에

1992년 가상역사 영화, "아버지들의 땅Fatherland"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이런 거대한 구조물들이 베를린의 약한 기반위에 건조되었을 경우에는

수년내로 지면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다. 

 "Welthauptstadt Germania"라는 단어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만 등장하는 단어이며

이것이 슈페어 혼자만의 생각인지, 히틀러 또한 동의하고 추구한 것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늘 현재 독일연방의회의 유리 돔은 히틀러의 구상에 등장했던

그 돔의 규모에 비교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유리 돔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 건물에 주재했던

히틀러의 야욕으로 인해 촉발되었던 동서 분단의 고통이, 위치 변경 없이

그 건물 그대로 갈라졌던 동, 서의 민의를 하나로 둥글게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는 한편, 문화적인 전통 또한 부럽게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대 돔모형의 조감도. 앞부분에 있는 것은 브란덴부르크 문.

 

 

 

 

 

대인배 독재자식 거대고전주의의 표본.

 

 

 

 

모형을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 독일 군수부 장관

 

 

 

 

초거대 돔의 내부. 상상도.

 

 

 

 

 

 

photo from : armishel.tistory.com/36

                      art-prints-on-demand.com

             quotecollection.com

bbc.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