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 Gallia]

슈트름게슈쯔 2012. 1. 13. 19:41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 Gallia 戰記) 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 부터 기원전 51년 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전체는 총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은

기원전 58년 부터 기원전 51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술했다.

 (단, 제3권은 57년과 56년을 모두 다루고 있다)

제1권부터 제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서술했고,

 제8권은 카이사르의 비서였던 발부스의 요청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부장이었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집정관까지 된 아울로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기술하였고

"나는... 이러했다"라고 쓰지 않고

"카이사르는....했다"라고

제3인칭 시점으로 기술했다.

히르티우스가 쓴 제8권은

사실적인 필체로 전쟁기를 기록하고 있다.

 

 

 

 

로마사뿐 아니라 서양사에 한 획을 그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로마 제일의 정치가이자 전쟁 영웅이면서 전장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은 문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책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8년간의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갈리아 전쟁기>와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루비콘 강을 건넘으로써

시작된 로마 내전을 기록한 <내전기> 단 두 권 뿐.

특히 <갈리아 전기>는 격렬한 전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로 전쟁 문학의 명저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갈리 족과 로마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지휘,

승리로 이끈 장군이 직접 전쟁 경험을 들려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살 곳을 찾아 침입해 들어온 이민족들에 맞서,

카이사르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독려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를 통해 후세 서유럽의 역사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카이사르가 위기를 기회로 바꿈으로써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

 

 

 

카이사르가 역사의 주도권을 잡도록 해주었던것이 갈리아 전쟁이었다.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벨기에,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말이다.

 

 

 

카이사르 BC100 7.12 ~ BC 44 3.15

 

 

카이사르 그에게는 누구도 따라올 수없는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있었고

두려움이나 위험을 무시하는 동시에

무모함을 거부하는 강인한 용기가 있었다

그는 대담함과 신중함을 겸비했고 계획뿐만 아니라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았으며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지닌 동시에 장교들의 애정과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병사들을 자신의 몸처럼 아꼈고

미로와 같은 전쟁에서 한가지 목표를 분명하고 끈질기게 추구했다

돈과 사랑에 있어 보여주는 사고의 자유로움

4대가 들어선 뒤에야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 당시 폼페이우스나 키케로에 비하면

뚜렷한 정치적 역량도 군사적 재능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갈리아 전기는 카이사르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갈리아 정복에 대한 글로,

오늘날의 프로방스 지역을 제외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 서부,

스위스 일대를 포함하는 갈리아 지역에서의 전투, 정복 상황을 카이사르가 직접 기록, 저술한 책이다.

42세에 로마를 떠나 처음 갈리아로 들어간 그는 이민족과 장장 8년에 걸쳐 전쟁을 수행한다.

카이사르는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이후 로마를 지배할 권력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은 카이사르일 것이다.

“로마의 장엄” (the grandeur that was Rome)이라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시구가 잘 묘사했듯이

 로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다.

 자연히 로마에서는 여러 부문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 탄생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카이사르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2세기 중엽부터는 지중해 연안지역의 유일한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복의 전리품들로 번성했다.

그러나 곧 사회 곳곳에서 쇠퇴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보인 로마 시민들의 꿋꿋한 정신은 차츰 약해졌고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점점 깊어졌다.

공화정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기관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었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은 실질적으로는 귀족정치였다.

그런 귀족정치체제는 오랫동안 효율적으로 움직였으나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제국이 갑자기 커지자 문제점을 드러냈다.

 당시 상황에서 귀족정치 체제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 대안은 군부독재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 대안을 도입한 사람이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그의 야심을 떠받쳐줄 만큼 부유하거나 영향력이 크지 못했고

 그는 정치적 입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그의 삶에서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입신이 아주 늦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정치가들이 타는 정치적 사다리에서 첫 가로장은 재무관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서른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재무관이 되었다.

군사활동은 더 늦어서 그는 마흔세살에 “갈리아전쟁”을 시작했다.

마흔세살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죽은 지 여러해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나이다.

카이사르의 그렇게 늦은 입신은 스물일곱살에

개선식을 치른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이력과 대비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재능을 발휘해서 빠르게 정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9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원로원에 불만을 품은 실력자들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연합해서

“제1차 삼두정치”를 시행함으로써 원로원을 거의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갈리아전쟁”을 시작했다.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천재를 발휘해서 그는 힘들고 긴 그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갈리아의 정복은 그에게 군사적 힘과 정치적 위세를 함께 주었고,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처음부터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원로원은 더욱 그를 경계했다.

그의 타협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이 적대적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아 그는 신변이 위험해졌다.

 마침내 그는 49년에 군대를 이끌고 자신이 통치하는

갈리아와 이탈리아반도를 나누는 조그만 강인 루비콘을 건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그의 군대를 막을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는 준비가 덜 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쉽게 부수고 이탈리아반도를 장악했다.

이어 48년엔 그리스의 파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로부터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독재자가 되어 권력을 완전히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왕정의 빛깔을 점점 짙게 띠어갔다.

자연히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의 불만과 두려움도 따라서 커졌다.

그래서 그를 없애려는 음모가 나왔고 마침내 기원전 44년 그는 원로원에서 암살됐다.

그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성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패배한 정적들에 대해서 놀랄 만큼 너그러웠고 항복한 정적들을 많이 기용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 은덕을 베푼 정적들로부터 존경이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그의 고뇌에 찬 외침은

자신이 용서하고 일을 맡긴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한 아픔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행위들에 당의를 입히는 것을 경멸하고 거부했다.

그래서 자신의 정권이 왕정으로 바뀌는 것을

공화정 지지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마음을 쏟지 않았다.

그의 암살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원래 그의 지지자들이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리 이상하지 않다.

적에 대한 너그러움과 당의를 입히는 일에 대한 경멸은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들의 조합으로 무척 위험하다.

 

 

 

 

카이사르의 삶에서 우리 눈에 이내 들어오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정력적 활동이다.

아주 늦은 나이에 입신했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암살되었지만

그는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이루었다.

갈리아 정복은 적대적 이민족의 위협을 거의 없앴다는 점에서 큰 군사적 업적이었다.

그의 정치적 개혁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체제를 효율적 체제로 바꾸어 놓았다.

비록 그가 도입한 정치체제가 군사 독재체제였다는 점에서 퇴행적 성격을 띤 점도 있지만,

그의 개혁은 아놀드 토인비의 평가대로

“로마에 동쪽에선 6백년 넘게 그리고 서쪽에선 4백년 넘게 지속된 유예기간을 주었다.”

그의 업적 가운데 후세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은 아마도 역법의 개혁일 것이다.

그가 만든 달력은 무척 합리적이어서 중세에 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가

좀 손질을 한 뒤 세계인들이 지금껏 사용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을 하는 사이에 그는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였다.

“갈리아전기”와 “내전기”는 그의 문재를 보여주는 훌륭한 저작들이다.

기원전 47년 소아시아 파르나케스왕의 반란을 진압하고 보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라는

멋진 승전보에서도 그의 문필 재능는 잘 드러난다.

 

 

 

승리자로써 이집트에 입성한 당시 나이 52세의 카이사르는 21세의 클레오파트라를 처음 만나 반해 버린다.

 

 

그는 성적 활동도 무척 정력적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의 느슨한 성풍속에서도 그의 성적 활동은 상궤를 벗어났다.

그는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왕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소문이 났었고

그의 동성애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추문이었다.

그는 많은 유부녀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런 일로 여러번 어려운 처지로 몰렸다.

이집트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특히 위험했었으니

그녀 때문에 오래 이집트에 머물러서 폼페이우스 세력이 한숨 돌리는 시간을 주었고,

그녀를 로마로 부른 일은 여론을 악화시켜서 그의 암살 음모를 촉진시켰다.

위에서 얘기한 것들은 카이사르가 위대하고 흥미로운 인물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가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인품과 업적을 따지자면 카이사르는 스키피오를 따를 수 없었다.

갈리아 정복은 로마의 안위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스키피오가 치른 싸움들은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로마가 살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들이었다.

카이사르가 싸운 군대들은 그리 강력한 군대들이 아니었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거느린 정예군과 싸웠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야만인들”로 부르면서 잔혹하게 짓밟았지만

스키피오는 패배한 이민족 군대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그러나 로마를 대표해온 것은 스키피오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연기를 잘 한다고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 마음의 깊은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리아 지방은 프랑스,독일,스위스와 벨기에,네덜란드등 유럽의 주요 국가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현재의 영국 그 시절의 브리타니아를 추가하면 갈리아 전기의 배경은 확실히 파악할수 있다. 

 

 

<갈리아전기>를 읽을 때에는 다음의 세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어떻게 '로마화'하였는가,

둘째 폴리스에서 제국 체제로 변화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셋째 정복당하는 소수 민족은 누구이고 어떠했는가이다.

 

<갈리아전기>는 기원전 58년부터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는 52년까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전쟁에 대한 역사이므로 '로마화'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지는 않는다.

부족 지도자 계급의 자녀를 로마화된 지역으로 보내 교육을 시키거나,

 정복된 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거나, 통상을 장려하여 문화/경제/군사적 통합화를 꾀했다고 한다.

책에 보면 갈리아 부족들의 항복 조건으로 다수의 볼모를 잡았고,

로마의 군인들과 상인들이 갈리아 지방에 다수 거주하였으므로 갈리아 지방에

로마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폴리스에서 제국 체제로 이행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여러가지 변화 중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군인들의 삶의 변화이다.

<강대국의 비밀>에서 자세히 언급되었지만 약 20년의 오랜 복무 생활로 고향에서의 터전이 사라졌고,

 전역후 속주에 정착하는 퇴역 군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고향땅을 지키는 폴리스의 삶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농사를 짓는 '시민'이 군대의 중심이 되는 체제에서 시민이 몰락하고

일부 귀족층인 기사와 용병들이 군대의 중추가 되는 시대로 변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복당하는 소수 민족들은 무수히 많았다.

연도순으로 보면 서기전 58년 지금의 스위스 지역의 헬베티인을 시작으로

57년 벨가이인이 정복되었고 56년에는 게르마니아인이 비록 정복되지는 않았으나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55년에는 브리타니아인이 정복되었고

52년에는 전술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아르베니인과 하이두이인이 정복되었다

특히 52년에 발생한 '알레시아공방'은 갈리안 진영만 봐도

보병 25만명, 기병 8,000명이 참전한 대규모 전쟁으로 그야말로 '갈리아의 운명을 둔 격전'이었다.

효과적이었던 초기의 게릴라 작전을 버리고 전면전을 채택한 갈리아인들은

'20세기 전쟁들이 발발하기 전까지 설치된 방어체계 중에서

가장 정교한 것'(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이라고 평가받는

로마인들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패배하였고,

이후 로마 몰락까지 지배를 받게 된다.

《갈리아 전기는 '라틴 문학의 정수이자 전쟁 문학의 고전'으로

이미 오래 전에 문학적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항상 서재가 설치된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갈리아전기에 대해 극찬을 하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갈리아 전기》를 '전쟁 기술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로 여겼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늘 이 책에서 그의 천재적인 전술들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1865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손자인 나폴레옹 3세가 알레시아였던 곳으로

알려진 지역에 베르킨게토릭스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는 프랑스인들이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고대 갈리아인에게서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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