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萬物相]

격동의 2011년 지구촌 [2]

슈트름게슈쯔 2011. 12. 26. 12:34

 

 

수십년 동안 휴화산이었던 칠레의 푸예우예 화산에서 화산 폭발로

고온의 가스와 10km에 달하는 화산재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 2011년 6월 5일

 

 

세계인들은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환희와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별나게

21세기는 지진과 화산 폭발이 쉴 사이 없이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자연의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2011년 6월 5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870km 떨어진

푸예우예 화산(Puyehue Volcano 2,240m)이 폭발함으로 항공기 운항 차질은 물론

주변 인접국가 아르헨티나는 커다라 피해속에 속수무책이었다.

칠레정부는 화산 폭발과 규모 4의 지진이 여러 차례 발생함으로써

주변 주민들을 긴급 대피 시키고 주변 상황에 예의 주시했다.

특히 칠레에는 130여개의 활화산을 비롯하여 2,000여개의 화산지대가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 샌프란 카를로스 드 빌릴로체 공항까지 날아온 푸예우예 화산의 화산재 - 2011년 6월 7일

 

 

 

오사마 빈라덴의 사살 소식에 환호하는 뉴욕 시민들 - 2011년 5월 2일 뉴욕 타임즈 광장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9.11 테러의 주범인 알 카예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라덴을 미군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파키스탄에서

사살 시킴으로써 10년간에 걸친 세계적 테러범 오사마 빈라덴의 추적 사냥을 마무리 지었다.  

 

 

 

워싱턴 D.C 백악관 상황실에서

 

미국 국가안보팀 구성원들(맨 왼쪽: 조 바이든 부통령, 맨 오른쪽 :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과 함께 모여

 

오사마 빈라덴 추적 작전을 예의 주시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무장단체에 의해 오사마 빈라덴을 죽인 미국의 습격에 대한 보복의 오토바이 자살 폭탄 테러에

차르사다에서 부상당한 남자들이

트럭에 실린채 페사와르의 레이디 리딩 병원에 도착되고 있다.

이 보복 테로 인해 69명의 인명이 사망했었다 - 2011년 5월 13일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오후, 평화롭던 북유럽 복지국가 노르웨이에서 난리가 일어났다.

 처음엔 수도 오슬로 시내의 정부 청사 건물 앞에서 초강력 폭탄이 터졌다.

이 사고로 청사 건물은 대거 파손되고 8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5명 이상을 다치게 했다.

이 속보가 나올 무렵, 시내에서 30킬로 떨어진 우퇴야 섬에서 총기 난사가 터졌다.

집권 노동당 주관의 청소년 정치캠프에 약 500여 명이 참가 중이었다.

범인은 32세인 에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였다.

경찰관 복장을 한 채 "폭탄 테러 관련, 안전을 위한 일"이라며 사람들을 모은 뒤 갑자기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범인은 확인 사살도 일삼았는데 이 테러로 인하여 모두 68명의 무고한 인명이 사망했다.

 

 

 

노르웨이 폭탄 테러의 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모식에 장미 행진을 하며 시청앞에 모인 오슬로 시민들 - 2011년 7월 25일

 

 

 

소말리아 모가디슈 바나디르병원에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7세 아들을 끌어 안고 있는 소말리아 여성 - 2011년 8월 14일

 

미국 정부는 지난 90일간 남부 소말리아에서 기아와 가뭄으로 인해 3만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은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방독면을 쓴채 몽둥이를 들고 시위 진압 경찰에게 돌진하는 그리스 아테네의 시위대 - 2011년 6월 28일

 

 

 

그루지야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진압 경찰에게 억류된 트빌리시의 야당지지 시위대

 

- 2011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 고베 난민 캠프로 몰려든 소말리아 피난민들 - 2011년 7월 19일

 

이곳은 벽돌같이 붉거나 옅은 황토빛 사막이다.

사막 위에는 유엔난민기구(UNHCR)의 하얀 텐트가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다.

지나다니면 슬픈 눈을 한 부모와 미소조차 짓고 있지 않은 어린이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최근 도착한 난민 2만 4000여명이 사는 곳이다.

다른 난민캠프 두 곳도 각각 4만 명이 넘게 살고 있다.

늘어나는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난민캠프 한 곳이 새로 열릴 예정이다.

소말리아 각지에서 이곳으로 오는 난민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다.

아픈 아동과 성인이 수두룩하다.

대부분은 영양실조로 무척이나 말라 있다.

이유는 동아프리카를 고통으로 몰고 있는 가뭄 때문이다.

그들은 말할 힘도, 어떤 희망을 붙잡을 힘도 없다.

그러나 어른이고 아동이고 할 것 없이 제가 미소로 악수를 청하며 서툰 소말리아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그들의 표정은 되살아난다.

눈에서는 희망이 반짝였고 몸에서는 생기가 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곳에 오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와야 했는지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교사였고, 농부였고, 가게 주인이었고, 목축민이었고 상인이었다.

어떤 아동은 학교에 다녔고, 어떤 아동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어떤 아동은 염소와 양을 쳤다.

그들에겐 따뜻한 가정과 꿈, 희망과 소망이 있다.

 바로 저나 당신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든 게 망연하기만 하다.
난민 캠프에는 아동들이 뛰어 놀거나 안전하게 머물곳이 없다.
사방 온통 천지에 낯선 이뿐이다.

낮에는 많은 아동이 텐트 안에 숨어있다.

어떤 아동은 난민캠프 주변의 덤불을 헤치고 다닌다.

이 아동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시센터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아동들은 쓰레기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어떤 아동은 아무나 볼 수 있는 쓰레기 더미 위를 화장실로 삼는다.

아동들은 너무나도 여위다.

이제 막 도착한 난민에게 나뭇가지와 천으로 얼기설기 지은 임시 거처는 편안한 쉼터가 되어주지 못한다.

임시센터에 온 가족들은 공식적인 난민지위를 획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며칠이 걸릴지 몇 주가 걸릴지 모른다.

사람들은 피난 때문에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그러나 아무도 지난 몇 주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들이 겪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난민캠프까지 오는 데 참은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앞으로 남은 나날을 어떤 고난 속에 보내게 될지,

얼마나 오래 캠프에서 살아야 할지, 동아프리카의 가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사망한 영국의 팝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런던 북부 집앞에 페인트로 덧칠된 그녀의 사진 액자 - 2011년 7월 23일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23일 오후 런던 북부 캠덴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신고를 받은 구급차가 긴급 출동했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각 언론은 와인하우스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의식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은 수년간 약물과 알코올 중독을 겪어왔으며, 재활원에서 치료를 받은 전력도 있다.

1983년생인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지난 2003년 `프랭크`(Frank) 앨범으로 데뷔,

이듬해 머큐리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독특한 패션과 개성 있는 음악 스타일로 세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은 와인하우스는

2006년에는 `백 투 블랙(Back to Black)` 앨범으로 브릿어워즈 여성 솔로 아티스트 부문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2008년 그래미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신인상,

여자 최우수 공연상, 최우수 팝보컬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을 휩쓸며 월드스타로 떠올랐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약물 알코올 중독 등의 가십성 스캔들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으나 그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가진 뮤지션이었다.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전 세계 음악팬은 물론, 팝스타들의 애도 역시 이어졌다.

 

 

 

 

1947년 이래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단일 토네이도가 2011년 5월 29일 미국 미주리주 조플린시에 몰아 닥쳐

 

139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지나간 다음날  파괴된 나무에 올라가서 성조기를 매다는 여성 

 

 

 

미시시피강의 지류인 울프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겨버린 테네시주 멤피스 맥 밀러 로드의 자동차들 - 2011년 5월 10일

 

 

 

케이프 플로리다에 위치한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는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 - 2011년 7월 8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가 8일 오전 발사돼 마지막 비행에 나섰다.
아틀란티스호는 이날 오전 11시29분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으며

12일간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한뒤 오는 20일 지구로 귀환했다.

아틀란티스호는 당초 오전 11시26분 발사될 예정이었으나

발사 30여초를 앞두고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이를 수리하느라 3분여 지체됐다.

아틀란티스호의 이번 비행은 1981년 4월12일 컬럼비아호 발사를 시작으로 한

미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중 135번째 비행이자 마지막 비행으로

미국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은 30여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국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는 컬럼비아·챌린저·디스커버리·아틀란티스·인데버호 등

총 5대의 우주왕복선이 참여했다.

우주왕복선들은 지금까지 지구궤도를 2만873바퀴 돌았고 8억6440만1218㎞를 비행했다.
이날 케네디우주센터 인근에는 75만명이 몰려 마지막 우주왕복선 발사 광경을 지켜봤었다.

 

 

 

 

미국 뉴멕시코주와 접경한 아파치 국유림 인근 애리조나주 산불지역 들판의 야생화로 날아드는 나비 - 2011년 6월 12일    

 

뉴멕시코 주와 접경한 아파치 국유림 인근 지역에서 5월 29일 산불이 일어 났다.
보름 이상 지속된 이 산불은 38만 9000에이커(1574㎢)의 임야와 건축 구조물 최소 11채를 태웠고,

이로 인해 주민이 대피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이 산불로 전날까지 3000여 명이 대피했고

이날 추가로 2700여 명이 대피했었다.
주 역사상 두 번째 큰 화재로 기록되는 이 산불은 진화 작업에도 난항을 겪었다.

일간 애리조나 리퍼블릭은 산불이 확산되고 있지만 불길을 잡지 못해

진화율이 0%를 기록하고 있다고 소방당국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방당국은 소방관 2000여 명, 헬기 20대 등 장비를 도입해 진화에 나섰지만

산불 지역에 시속 35마일(56㎞)의 바람이 불고 습도가 낮아 어려움이 계속 되었다.

 

 

 

허리케인 아이린이 지나간후 별장의 계단 자리에서 앉아 흐느끼는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 - 2011년 8월 28일

 

이 자리에 있었던 별장은 1903년에 지어졌으며 Nags Head의 Albemarle Sound에 지어진 최초의 휴가 별장이었다.

이 별장은 1963년에는 미국의 역사적 장소중 하나로 국립 기록에 등재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텍사스주 샌 안젤로 피셔 레이크의 가뭄으로 바짝 마른 호수 바닥에서 자라는 잡초 - 2011년 7월 25일

 

이 호수는 홍수 조절을 통제하고 산 안젤로와 주변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호수였다.

5440에이커에 달하는 이 호수는 최대 깊이가 58피트이며 보트로 낚시와 수영을 즐길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짝 말라 버렸다.

산 안젤로 지역에 2011년 한해의 강우량은 단 2.5인치였다.

지난 9개월 동안 최악의 수준으로 분류된 가뭄으로

이와같은 자연의 재앙은 1895년 이래 텍사스 역사상 최악의 가뭄이라고 한다.   

 

 

 

야생 표범 한 마리가 인도에서 11명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표범은 7월 19일 인도 웨스트 벵갈주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빠져 나와

인근 프라카시 나가르 마을에 침입해 마을주민 6명, 경찰 1명, 산림경비원 4명 등 모두 11명을 덮쳤다.

이 수컷 표범은 진정제를 맞아 잡혔지만 산림경비원들이 휘두른 칼과 봉에 맞아 결국 수시간 후에 죽었다.

 

 

 

승리의 환희를 지르는 일본의 미드 필더 호마레 사와 선수 - 2011년 6월 17일

 

 

18일 새벽 일본 열도에 또하나의 쓰나미가 덮쳤다.

4개월전 일본 도호쿠 지방을 덮쳐 수만명의 희생자와

최악의 원전사태를 자아낸 고통의 쓰나미가 아니라 이번엔 환희의 쓰나미였다.

일본 네번째 키커 구마가이 사키의 슛이 미국의 골망을 가르는 순간

120분간 숨막히는 경기에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던 2011 FIFA 여자월드컵 우승팀의 향방이 가려졌다.

이 순간 밤잠을 잊은채 초초하게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일본 국민들의 환호성으로 일본 열도가 들썩거렸다.

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호외를 발행하며 ‘아시아국가의 첫 월드컵 우승’을 자축했다.

월등히 우세한 전력의 미국을 상대로 골을 먹으면 동점골을 만회하며

끈질긴 승부근성을 보여준 일본 여자축구는 3·11대지진과 쓰나미, 원전사태의 3중고를 겪고 있는

일본 국민에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1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코메르츠방크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 축구대회 결승경기까지만 해도 세계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인

미국을 꺾고 일본의 승리를 점치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았다.

일본은 1991년 초대 대회부터 매번 여자 월드컵 본선에 올랐지만

1995년 2회 대회 때 8강 진출 이후 한 차례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번 대회에서 8강전 우승후보 독일, 4강전 유럽의 강호

스페인을 잇따라 꺾고 파란을 연출했지만 결승 상대는 세계 최강 미국이었다.

 

 

 

 

캐나다 밴쿠버의 폭동이 일어난 도로위에서 격정적 키스를 나누는 커플 - 2011년 6월 15일

 

 

2011년 6월15일 밴쿠버의 하키팀 캐넉스가 미국 보스턴 브루인스에 우승을 빼앗긴 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거리폭동이 계속되는 현장에서

키스를 하는 커플 사진이 인터넷 매체에 유포되자

이들은 곧 '폭동속의 미스터리 커플'로 명명되며 세계적 추적의 대상이 됐다.

   사진에서 커플은 화염이 이는 거리를 배경으로 경찰과 폭동 군중이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인 중간 지대 아스팔트에서 꼭 껴안 채 키스를 나누고 있는데,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극적인 대비와 상징성을 보여주는

이 사진을 두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는 갖가지 추측이 만발했다.

   일부에서는 연출 사진일 것이라는 짐작을 내놓기도 했으나

네티즌 제보를 요청하며 추적에 나선 CBC가 이틀 만에

호주에 사는 남성의 가족으로부터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남녀는 호주 국적으로 밴쿠버에서 6개월째 바텐더로 일하며

코미디언 겸 배우로 활동중인 스콧 존스(29)와 캐나다 온타리오 구엘프 대학 출신의 알렉스 토머스로

두 사람은 갓 사귀기 시작한 사이로 밝혀졌다.

   사진이 인터넷에서 급속도로 유포되기 시작하자

호주에 사는 존스의 누나가 사진 속 동생을 알아보고

이메일을 통해 처음 CBC에 이 사실을 알려왔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이어 그의 아버지 브렛도 이들 남녀가 자신의 아들과 새 여자친구라고 전해왔다.
 브렛에 따르면 이들은 경기가 끝난 후 다른 관중과 마찬가지로 거리로 나섰다가

곧 폭동현장을 마주쳤다.

   이어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 군중과 경찰 사이에서 고립됐고,

경찰의 거친 해산 작전 과정에서 알렉스가 경관의 방패에 밀려 길에 넘어지자

존스가 여자친구를 위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장면이 사진이라는 게 아버지의 설명이다.
존스는 쓰러진 알렉스에게 키스하며 "괜찮을 거야"라고 위로하고 있었는데

이 순간을 사진기자가 포착했다고 그는 전했다.

   알렉스는 길에 넘어지면서 다리가 멍드는 부상을 입었으나

두 사람 모두 다른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녀는 자신들의 사진이 세계를 돌며 폭발적 관심을 일으키자

"무척 놀라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또 현장을 잡아낸 사진기자 역시 전세계 매체들로부터

사진 게재에 관한 문의로 바쁜 이틀을 보냈다.
존스는 비자만기가 다가오는 며칠 후 미국을 거쳐 호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폭력현장의 이들 커플 사진은

스탠리컵의 혼란과 소동 속에서 영원하게 남을 한줄기 빛이 될 것이라고 CBC는 말했다.

 

 

수술실 의사 복장을 한 익살스러운 팬에게 펀치를 날리는 투르 드 프랑스 3회 우승자 스페인의 알베르토 콘타도르 선수 - 2011년 7월 22일

 

 

2011년 7월 뜨겁게 달군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가

지난 7월 24일 마지막 21번째 스테이지를 마치며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관심을 받았던 알베르토 콘타도르의 4승과

앤디 쉴렉의 첫 우승 경쟁은 첫 구간부터 발생한 사고로 조금 시들해졌고,

예상치 않았던 토마스 보클러와 케이델 에반스가 끝까지 컨디션을 유지하며 경쟁의 재미를 살렸다.
이와 같은 경쟁은 18번째 구간에서 레오파드-트렉 팀의 뛰어난 전술과 함께

앤디 쉴렉의 옐로우 저지 획득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마지막 산악구간에서는 알베르토 콘타도르의 선전이 있었지만 순위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투르 드 프랑스의 가장 극적인 구간은 역시 20번째 TT(타임 트라이얼)이었고,

경이적인 기록을 보였던 케이델 에반스가 앤디 쉴렉과 2분이 넘는 차이를 만들어내며

첫번째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케이델 에반스는 이번 투르 드 프랑스에서 단 하루 옐로우저지를 입게 되었지만,

그것이 최종 우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호주 출신의 첫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이어서 커다란 의미를 갖기도 했다.

투르 드 프랑스 2011 결과
- 옐로우 저지 : 케이델 에반스 (BMC RACING TEAM)
- 그린 저지 : 마크 케빈디쉬 (HTC-HIGHROAD)
- 폴카도트 저지 : 사무엘 산체스 (EUSKATEL-EUSKADI)
- 화이트 저지 : 피에르 롤랜드 (TEAM EUROPCAR)
- 팀 종합 우승 : 팀 가민-서벨로 (TEAM GARMIN-CERVELO)

 

 

 

 

21득점 11리바운드로 댈러스 매버릭스의 승리를 이끈 더크 노위츠키 선수 - 2011년 6월 12일

 

NBA 2011 결승전은 서부지역 승자 Dallas Mavericks 가 동부지역 승자 Miami Heat 팀을

 

105:95 로 Game 6 에서 이겨 4-2 로 최종 우승하였다.

 

 

 

 

스페인 팜플로나 산 페르민의 소달리기 축제가 벌어진 투우 경기장 속에서 점프하여 엎드린 관중들 위로 돌진하는 황소 - 2011년 7월 6일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지역에 불어 닥친 거대한 모래 폭풍 하부브 - 2011년 7월 5일

이 모래폭풍은 애리조나 주 남부 투산 근처에서 시작해 시속 30마일(48㎞)의 속도로

북쪽으로 확산해 피닉스 지역까지 뒤덮는 등 반경 50∼70마일(80∼112㎞)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피닉스 스카이 하버 국제공항이 약 1시간 동안 폐쇄되면서

일부 항공편 운항이 지연되고 몇몇 지역에서는 시야가 가려져 차량 운행에 불편을 겪었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공급이 끊기면서 다음날 오전까지 수 천명의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 모래폭풍은 애리조나주 사막 지역의 고온 저습한 날씨로 인해 매년 여름 발생한다.

 

 

 

캐나다 토론토의 CN타워에 내리치는 낙뢰 - 2011년 5월 29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500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푸예우예 화산의 폭발시 상공에서 일어난 괴기스러운 다발성 번개

 

- 2011년 6월 6일

 

 

 

 

캄팔라 수도에서 있은 시위에서 경찰이 우간다 야당지도자들에게 물감들인 물을 퍼붓고 있다  - 2011년 5월 10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을 반대하며 더블린에서 시위를 벌이는 여성 - 2011년 5월 17일

 

 

5월 18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아일랜드에 나흘간의 일정으로 방문했었다.

이는 몇 가지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일단 1911년 여왕의 할아버지인 조지5세 이후 100년만에 아일랜드를 방문한 영국 국왕이라는 것과

그리고 1921년 아일랜드가 치열한 투쟁을 통해 영국령에서 독립한 이후로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은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과

더불어 2011년 5월 국제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한지는 꽤 되었지만 양국 간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아일랜드는 치열한 투쟁 끝에 1921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으며

이후로는 북아일랜드 독립문제 등으로 오랜 세월 갈등을 빚어왔다.

이는 국가 간 정치적인 갈등이자 신구교간 종교적인 갈등이었기에 양국민간 감정의 골을 상당히 깊게 만들었다.  

실제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둘러싸고 수없이 많은 테러 위협이 제기되었다.

특히 영국을 오랜기간 괴롭혀온 IRA 잔존 세력의 테러 위협으로 인해

극도의 경호 및 경비가 펼쳐지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짜 폭탄이기는 했지만 더블린행 버스에서 사제 폭발물이 발견돼

아일랜드 군이 해체작업을 벌이는 소동을 겪었고

방문 이틑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추모공원을 찾아 참배를 하는 동안

공원 밖에서는 수십여명의 아일랜드인이 여왕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아일랜드는 경찰 6천여명을 동원해 주요 경로에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

삼엄한 경비를 펼쳤고 무장한 영국 경찰 120명까지 여왕의 안전을 위해 현지에 파견되어 순찰을 하였다.

현지 언론들은 이러한 영국여왕의 방문에 대한 시위나 여러 위협들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100년만에 이루어진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방문을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의미를 부여했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로 송환되어 법정에 선 보스니아 내전 특급 전범 라트코 믈라디치(69) -2011년 6월 3일 

세르비아 특별법정은 5월 31일 송환결정에 불복해 믈라디치가 제기한 항소를 기각한 직후

그를 베오그라드공항으로 이송해 항공편으로 송환했다.

앞서 이 법정은 5월 27일 믈라디치에 대해 송환결정을 내린 바 있으며

이에 그의 변호인은 즉각 항소를 신청했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군사령관이었던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에서 이슬람 주민 8000여명을 인종청소 한 혐의로

1995년 ICTY에 의해 기소돼 16년째 수배 중이다가 5월 26일 세르비아에서 검거됐다.

 

 

 

폭동이 일어난 런던 남부 주거지역 크로이든 거리의 불타는 건물 앞을 지나가는 시위대 진압 경찰들 - 2011년 8월 8일

 

런던 북부의 토트넘에서 폭동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8일 런던 중심가 등 20여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동시 다발로 벌어지고 제2도시인 버밍엄, 항구도시 리버풀과 브리스틀 등

다른 도시로 확대되면서 영국이 국가 비상사태를 맞았다.

나라의 심장부가 활활 불타고 약탈당하는 장면을 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런던시장 보리스 존슨은 이날 해외 휴가 중 급히 귀국했다.

이번 연쇄 폭동은 올해 동화 같은 로열웨딩과 내년 런던올림픽으로 포장된

'화려한 영국'에 가려졌던 청년실업과 빈부 격차로 점철된 이면을 노출했다.

 

 

런던의 버밍엄 불링 쇼핑센터 보석가게의 윈도우를 발로 차며 약탈을 저지르는 흑인들

 

런던의 경우 폭동 지점은 8월 초 사흘간 북부→남부→동부 빈민가 외곽으로 번지더니

2012년 런던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이 있는 해크니, 국회의사당 인근 일링 지역까지 파고들어왔다.

각지에서 수십~수백명의 청년들이 경찰차량과 버스를 벽돌·각목·쇠파이프 등으로 파손하고

공공기물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을 향해 차를 몰아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대형 상점에 몰려가 유리를 깨고 물품을 약탈하는 통제 불능의 무법천지가 펼쳐졌다.

8월 9일 남부 크로이든에선 26세 남성이 총격으로 사망, 폭동으로 인한 첫 사망자가 발생했었다.

폭동의 핵심은 무차별 약탈이었다.

폭도들은 대부분 10~20대로 후드티와 마스크·두건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흑인뿐 아니라 중동권·백인도 눈에 많이 띄었다.

주로 대형상가에서 전자제품 등 고가의 물품과 식량·의복 등 생필품까지 약탈했며

여성들도 가세해 옷·화장품 가게를 터는 '약탈 쇼핑'을 저질렀었다

 

 

 

 

교통 경찰의 부족으로 교통 경찰 제복을 입고 자원 봉사를 하는 벵가지의 리비아 보이스카웃 소년 - 2011년 6월 2일

 

 

 

남부 수단 쥬바에서 독립 기념일 선포식을 맞이하는 남부 수단 인민 해방군(SPLA) 병사 - 2011년 7월 5일

 

 

 

수백만명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50년 이상의 전쟁 이후 수단으로 부터 독립한

 

남부 수단의 쥬바에서 자정의 시간에 수단으로 부터 분리 독립 소식에 기뻐하는 남부 수단 주민들 - 2011년 7월 9일

 

  

 

중국 고속열차 추돌 사고가 난 저장성 윈저우시 슈앙위 마을 사고 현장 - 2011년 7월 24일

 

 

중국 남부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슈앙위 마을에선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23일 오후 8시34분. 하늘에서 ‘우르르 꽝’하는 벼락이 한 번 내리치는가 싶더니

 시속 200㎞ 속도로 이 마을 교량 위를 지나던 열차 하나가 멈춰섰다.

불운(不運)의 시작이었다.

벼락을 맞은 중국 고속열차 ‘둥처(動車)’ D3115호는 순간 동력을 잃고 멈춰섰다.

맹렬한 속도로 뒤따르던 다른 열차는 이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멈춰 섰던 D3115호는 충격을 이기지 못했고, 이 열차의 15·16번 객차 두 량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20~30m 아래 땅으로 곤두박질했다.

중국 국영 CCTV가 촬영한 사고 차량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승객들이 남긴 옷가지와 신발, 각종 음식과 침구류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추돌 당시 충격을 보여주듯 열차 유리창은 모두 바스라져 있었고,

강철 외벽은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심하게 파손됐다.

갑자기 멈춰선 열차에서 불안에 떨던 D3115 열차 승객들은 더 큰 불운이 곧 닥칠 것인지 그땐 미처 몰랐다.

뒤따르던 열차가 추돌사고를 내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 나는 것 같은 충격이 이어졌다.

몇몇 승객들은 심한 타박상을 입는데 그쳤지만, 15·16번 객차는 이에 멈추지 않고 결국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섯살배기 아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았어요.”
원저우의 한 병원에 입원했던 여자 승객 조우씨는 아들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고 중국 매체들에 말했다.

타박상을 입었지만 조우씨의 아들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추돌·추락 사고로 16번 객차에서만 60여명이 튕겨져나갔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고 중국 매체들은 전했다.

이 사고로 중국 당국은 현재까지 35명이 사망하는 등 2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밝혔다.

 

 

이슬람교의 금식일인 라마단의 첫날  인도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그랜드 모스크) 앞의 텐트 로프를 잡고 있는 무슬림 소년 - 2011년 8월 2일

 

 

 

리비아의 정세 불안으로 리비아와 튀니지의 국경 근처인 Dehiba로 피난간 주민들이 설치한 텐트에서 노는 어린이들 - 2011년 5월 8일

 

 

 

골란 고원 시리아의 Majdal Shams 마를에 모인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터지는 이스라엘군의 최루탄 - 2011년 6월 5일

 

 

이스라엘 건국을 지칭하는 '나크바(대재앙)의 날'을 맞은 2011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인들이 각지에서 이스라엘 점령 정책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이스라엘군과 곳곳에서 충돌해 최소 21명이 숨졌다.

페이스북을 통해 모인 팔레스타인인들과 그 지지자들은

이날 이스라엘과 접한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 일대를 비롯해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역, 요르단 등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며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최소 21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던 골란고원에서는 시리아 쪽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진입하려다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았다.

시리아 언론은 이날 현장에서 8명이 숨졌다고 보도했지만

이스라엘 군 라디오 방송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시신 10구를 시리아 측에 넘겼다. 

 

저장성 첸탕강의 들이닥치는 파도에 휩쓸리는 관광객들과 공안 경찰 - 2011년 8월 31일

 

 

중국 저장(절강)성 쳰탕(전당)강 북부에 있는

하니잉(해녕)시 라오옌창에는 해마다 '돌아오는 파도'를 구경하러 온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첸탕강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중국 4대 기이한 경관으로 꼽히며

매년 음력 8월 16일~18일 사이에는 중국 각지에서 밀물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또한 약 10m의 파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가까이서 관람하게 되면 자칫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2011년 8월 31일 오후 1시 30분쯤 돌아오는 파도를 구경하던 20여명의 여행객들이

삽시간에 몰아치는 파도로 중경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었다.

 

 

홍수로 물바다가 된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의자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후베이 대학 학생들- 2011년 6월 18일

 

 

 

이스라엘의 재앙의 끝을 기념하는 행사인 라그 바오메르 행사에서

붙붙은 장작더미 사이로 유대인 소년이 뛰어다니고 있다 

이스라엘은 로마시대에 오랜세월 동안 박해를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1년 5월 21일

 

이스라엘 전역에서 동네 곳곳마다 벌어진 봉화불 축제를 "라그 바오메르"라 부른다.
"라그 바오메르"란 유월절부터 제 33일 째 되는 날을 가리킨다.
이 말을 좀 더 풀어 보면 "라그"는 히브리어의 '라메드'( )와 '김멜'( )을 붙여서 읽은 것으로서
히브리어 숫자로 33을 나타낸다.
'오메르'는 문자적으로 (곡식의) 단, 혹은 곡물등의 계량단위를 나타내는데,
유대교에서는 유월절 절기의 둘째날에 성전에 가져오는 첫 보리 수확의 예물(제물)을 의미하며
그 오메르의 양은 10분의 1이 에바 (약 2.2리터)였다.
이 오메르를 바치지 않고는 첫 수확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월절부터 칠칠절(기독교의 오순절) 사이의 기간(즉 7주간)을 "오메르의 기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라그 바오메르"란 '오메르의 기간 중 제 33일째" 즉 유월절로부터 제 33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날에 봉화불을 피우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승이 있으나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주후 132-135년에 있었던 제2차 유대반란과 관련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마사다 항전으로 유명한 제1차 유대반란(주후 66-73년)은
처음부터 계획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 반면에,
제2차 유대반란은 당시 영향력 있는 랍비였던 랍비 아키바의 정신적인 지도와 함께
치밀하게 준비되고 조직화된 반란이었다.

제2차 유대반란은 애굽과 사이프러스 등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한 주후 115-117년의 반란 때문에
페르샤 원정군을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던 트라얀 황제에 이어 등극한 하드리안 황제 때에 발발하게 된다.
처음에 하드리안 황제는 그가 일으킨 대규모 건축공사 계획 가운데
주후 70년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포함시킴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성전회복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하드리안 황제가 이 계획을 철회함과 아울러 유대인의 할례의식을 금하는 명령을 내리자,
랍비 아키바의 정신적인 지도하에 반로마의식이 구체화되었고, 조직적으로 반란계획이 이루어지게 된다.
로마군에게 무기공급을 담당하는 유대인 하청업자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결함이 있는 무기를 공급하게 하고,
그래서 퇴짜 맞은 무기들을 수리하여 비축하는 식으로 반란을 준비하였다.

반란군 지도자로 뽑힌 자는 바르 코크바( - )였다.
바르 코크바는 아람어로 '별의 아들'이란 뜻이다.
랍비 아키바는 메시야 관련 본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민수기 24:17의
"한 별이 야곱에게서 별이 나온다"는 구절을 바르 코크바에게 적용시켜 그를 메시야로 추대하였다.
바르 코크바는 매우 카리스마있는 지도자로 알려 지고 있으며
'나시'( , 지도자, 요즘에는 대통령을 지칭)라는 타이틀로 율령을 반포하고 동전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바르 코크바의 유대반란군은 과거 주전 167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항거하여 일어 났던
마카비 혁명의 진원지였던 '모디인'을 다시금 반란의 출발지로 삼았다.
패전을 거듭하던 그들이 오메르 33일째 되던 날에 드디어 로마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전 소식을 봉화불로 유대인 마을 마을로 알리게 된 것이 '라그 바오메르' 축제이다.

한때 바르 코크바 반란군은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장악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율리어스 세베루스 장군 휘하의 로마 8개 군단과 보급부대와 3년간의 소모전을 벌인 끝에,
주후 135년 바르 코크바가 죽음과 최후를 맞게 된다.
로마군은 이 전쟁에서 50개의 성채와 985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58만명의 유대인을 죽였다고 한다.
이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축출당하게 되며,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이 금지되게 된다 (안식일 준수금지, 토라연구 금지, 할례금지).
뿐만 아니라 하드리안 황제는 제2차 유대반란을 계기로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명칭을 '아옐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개명하였으며,
그리고 이 땅의 이름을 유대인들에게 가장 저주스런 이름중의 하나인 블레셋
곧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주 판즈와이 지구 스페르완 가르 캠프 베이스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캐나다군 병사 - 2011년 6월 24일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딸인 아이샤 카다피의 트리폴리 집에서

 

그녀의 얼굴을 부조하여 만든 황금 인어 의자에 앉아 기념 촬영을 하는 리비아 반정부군

 

- 2011년 8월 24일 

 

 

 

리비아 정부군과 대치한 최전선이었던 미스라타 서부의 반정부군 진지에서 발사되는 그레이드 로켓 - 2011년 6월 20일

 

 

 

 

 

 

photo from : Hassan Am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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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p Somodev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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