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56살에 낳은 아들 야마모토 이소로쿠[Yamamoto Isoroku name is 56]

슈트름게슈쯔 2012. 7. 8. 15:28

 

 

야마모토 이소로쿠(1884 ~1943)

 

 

현대 전쟁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라는

이름을 한 번 이상은 들어 봤을 것이다.

 

야마모토라는 성은 일본인에게는 매우 흔한 성씨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소로쿠라는 이름은 그리 흔한 이름이 아니다.

 

 

 

 

 

 

 

 

토시로 미푸네(三船 敏郎 : 1920 ~1997)

 

 

한국의 7080세대들 에게는 1977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미드웨이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역으로 출연했던 

일본배우 토시로 미푸네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기가 인상깊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 함대(連合艦隊)의 사령관이었으며,

역사상 최초로 항모 중심의 전술을 과감히 실전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름의 한자를 보고

매우 이상 야릇한 이름이라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소로쿠(五十六)의 한자는 숫자 56을 의미한다.

세상에 자기 아들 이름을 오십육(56)으로 짓는 부모가

어떤 부모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이름의 유래를 보면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한 형태로 이름을 짓는 일본인다운 생각이었다고 할수 있다.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등에 의하여 강대한 국가를 넘어서

제국주의국가로서 성장하던 시점인 1884년에 태어났다.

즉,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늦둥이었는데 그 때 아버지의 나이가 56세 였다고 한다.

 

(이름이 특이하게도 "56"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56세 때에" 그를 보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다 늙어서 얻은 늦둥이 자식"이었던 셈이었다.)

그는 당시 자기 집안 내에서 큰 기대를 받던 친척이 사망하여,

그의 아버지가 "가문을 빛낼 인물이 사망했다"면서 한탄하자,

"그렇다면 제가 가문의 영광을 이루겠습니다!"라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는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였던

"대한해협해전"(일본명 "쓰시마해전")에 참가하여

손가락 두개를 잃어버리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서 아마도 당시의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에 더하여

어뢰와 기뢰 등을 중시하던 도조 헤이하치로 제독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즉, 거대한 대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물론 당시 일본군은 대포를 많이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대포의 포탄은 여기에 더하여 "시모세"라는 인화성이 강한 화약을 폭발약으로

사용함으로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던 러시아 함대를 말 그대로 불지옥 함대로 만들었다.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책에서 그에 대한 내용을 읽어보다보면,

가히 "대구 지하철사건 당시의 상황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어뢰나 기뢰 등을 사용하여 - 구축함이나 어뢰정 등의 작고 빠른 배를 이용하는 것 만으로도

- 적의 거대 전함을 박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발틱함대와 대한해협에서 싸우기에 앞서서

이미 마카로프 제독이 이끌던 뤼순항의 함대는 어뢰와 기뢰로 격파당하거나 봉쇄당하여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또한 블라디보스톡의 소함대도

 기뢰에 의하여 출동을 봉쇄당하였다.)

그 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발전되어진

항공기를 이용하여 해군작전을 펴는 것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기실 1921년에 나오기 시작한 미국의 빌리 미첼 장군이 실시한 실험을

그가 1920년대 초반에 외교관의 신분으로서

 - 미국의 석유자원에 대한 연구 등도 겸하여 - 미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미첼 장군의 경우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결국 미국 육해군 내부의 보수주의자 "꼴통 노인네들"에 의하여 무너졌던 것에 비하여,
그는 이후 일본 해군 내에서 여러 힘 있는 직책들을 맏게 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마침 그에게는 이 외에도 운이 더 트이고 있었으니,
바로 일본 해군의 힘이 점점 강성해지던 것을 못마땅해하던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나 독일 등을 견제하기 위하여서라도

 일본군이 강성해지던 것을 환영하던 입장이었던)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게 "전함보유량을 줄일 것"을 요구하는

 "워싱턴 조약 내용에 서명할 것" 등을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당초 전함 혹은 순양함 등으로 건조 혹은 건조가 목적되어져 있었던 많은 함정들

- 나중에 진주만 공격대에 참가하게 되는 함정들도 여럿 포함 -

이 이 과정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되어지게 된다.
게다가, 외국비행기들을 수입해서 사용하던 일본의 비행기 제작기술도

일취월장(日就月壯 -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몰라 볼 정도로 크게 발전한다.)

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그는...

(1) 항공모함으로 목표로 삼은 적의 함대 혹은 적의 기지(요새) 근처까지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함대를 이동시킨다.

(2) 가급적 적의 함대 혹은 적의 기지(요새)에서 좀 먼 곳에서

 - 비행기의 항속거리 한계지점에서 - 비행기들을 발함(發艦)시킨다.

(3) 주력함대가 나설 필요가 없이

 

-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해군의 대체적인 전략도 어차피 주력전함들이나

순양함들을 동원하여 전투하기에 앞서서 잠수함이나 항공기 혹은 구축함의 어뢰 등을 사용하여

 적의 주력전함이나 순양함들을 파괴 혹은 손상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이 적의 주력함대

혹은 적의 강력한 기지(요새)를 공격 및 파괴한다.

(4) 이렇게 하면, 일본해군은 주력함대를 전혀 손상당하지 않고서

 - 단지 항공기 몇대와 조종사 몇명 정도를 잃어버리는 선에서

 - 승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력함대를 위시한 본대(本隊)가 가서

 "목표한 지역을 장악"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생각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전함 나가토 내부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 1940년 초

 


젊은 시절 미국에  유학을 갔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누구보다도 미국의 산업화된 거대한 국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미국과의 전쟁을 마지막까지 반대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국론이 전쟁쪽으로 기울고 더 이상 전쟁이 회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어갔다.

 이 전쟁은 길어야 1년이 한계라고 생각한 그는,

될 수 있는 한 단기간에 많은 피해를 입혀 미국내의 반전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입안 된 작전이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 작전이었다.

 

 

야마모토가 선택한 공격수단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항공기를 전면에 내새운 공격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항공모함과 항공기의 잠재성이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고,

해군 항공전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품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에 항공기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 도박이었다.

해군 내에서도 이 작전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많았다.

전통적으로 일본 해군의 전략 사상은 거함과 거포를 이용한 함대 결전이었다

(사실 당시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전략 사상을 갖고 있어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과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을 고집했고,

만약 이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령관 직을 내놓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대본영의 작전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야마모토는 작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는 먼저 진주만과 비슷한 지형을 가진 곳을 찾아 훈련장을 설치하고,

항공대 파일럿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작전 실행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진주만의 수심이 상당히 얕다는 것이었다.

항공기를 이용한 어뢰공격을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수심이 필요했다.

항공기에서 떨어진 어뢰는 낙하 에너지에 의해 착수 후에도 일단 상당한 깊이까지 가라앉게 된다.

만약 수심이 얕은 경우 당연히 어뢰는 해저면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가지 방법을 착안한다.

낙하 에너지를 최소화 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면 아슬아슬한 고도에서 어뢰를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난이도는 둘째치고 상당히 위험천만한 행위였지만,

중일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은 야마모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번째는 어뢰 자체에 착수 후에 가라앉는 것을 최소화하는 형태로

부력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뢰가 위로 뜨게끔

어뢰의 스크류 부분에 목재로 정교하게 제작한 

목제 핀을 이탈되지 않게 부착시카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본영의 작전 승인과 출전 명령뿐이었다.

한편, 미일 정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교섭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섭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더 이상의 교섭이 불가능함을 깨닳았고,

그 시점에서 일본은 교섭을 이용한 시간끌기에 들어간다.

대본영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기습 작전을 승인하고,

얼마 후 연합함대에는 출전 명령이 떨어진다.

나구모 제독이 이끄는 6척의 항공모함이 포함된 기동 함대는 진주만을 향한다.

 마지막까지 교섭 타결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야마모토는 출진전의 나구모 제독에게,

'교섭이 타결될 경우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즉시 회항 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미 교섭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지점이 이르렀다.

대본영은 기습작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교섭 중단과 선전 포고,

 공격 개시 시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즉, 선전포고와 공격 개시 사이의 시간차를 최소화 하여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사실 대본영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지만,

 이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미국내의 반전 여론을 일으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던

 야마모토에게 있어 선전포고라는 '명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 때분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부터 일본은 패전의 첫 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글을 보게 되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였다.'

히지만 이것은 사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일본은 교섭 중단과 선전포고를 미국에 확실히 전달했다.

문제는 이것이 진주만 공격이 있은 후 수 시간이 흐른뒤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일본의 어이없는 실수의 책임은 외무성과 주미 일본 대사관에 있었다.

일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외무성의 전신 통제는 안일하기 짝이 없었고,

 주미 일본 대사관에 긴장감 제로의 상태였다.

특히 대사관의 당직 근무자는 진주만 기습 당일 근무를 팽개체고

 아침 성당 미사에 참석하였고, 미사가 끝나고 돌아온 그의 앞에는

교섭 중단과 선전포고를 알리는 암호 전문이 도착해 있었다.

사실 암호를 해독하고 그 내용을 미국 행정부에 전달했다면 늦지 안았을 시점이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일본 대사관은 해독한 전문을

정서(해독된 암호문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다시 쓰는 일)하여,

 말끔한 공문서로 제작하여 미 행정부에 전달한다.

이는 애리조나호가 진주만에서 폭격을 받아 침몰한 뒤의 일이었다.

미국은 '비열한 일본의 기습 행위를 규탄 하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전쟁 반대 여론이 강력했던 미국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본 타도'로 돌변했고,

 각지의 징병소는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photo from :Axis History Fo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