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유태인들의 격리 구역이었던 폴란드 게토의 비참했던 모습[WW2 Poland Jewish Ghetto,s misery ]

슈트름게슈쯔 2012. 8. 22. 14:18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거주구역 게토에 설치된 담장 - 1941년

 

 

 

독일군에 점령당한 폴란드 우치(Ludz)시 게토의 모습

 

 

 

 

 

 

 

폴란드 우치시  Zgierska거리 게토 육교 부근의 모습

 

이곳은 영화[피아니스트]의 무대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치 게토 쓰레기더미 밑의 땅을 파서 먹을것을 뒤지는 유태인 여성들과 아이들

 

 

우치의 게토에는 20만 명의 유태인이 몰려 있었다.

한 방에 평균 5.8 명을 수용한 꼴이다.

4만 5000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어 갔으니 이것은 바로 유태인 절멸 수용소 였다.

바르샤바의 게토에는 44만 5000 명 정도의 유대인이 몰려 있었는데, 한 방 평균 7.2 명의 밀집 상태였다.

여기서는 20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8만 3000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태인은 게토로 밀려 들어갔다가, 여기서 처형을 위해 열차로 절멸 수용소로 쏟아져 나간다.

게토 내부는 일종의 미니 독재 체제하에 있었으며, 하임 모르데하이 룸코프스키 같은 남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남자는 우치의 게토에서 엄청 거드름을 부리는 권력자로서,

 자신의 흉상을 우표에 인쇄까지 해 놓고 있었다.

지배자들은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유대인 자치 경찰을 통해 게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이런 경찰관이 2000 명 있었는데, 이들은 폴란드 경찰에 의해 감독되었고,

물론 무장한 독일의 치안 경찰과 친위대가 구석구석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게토는 문화적으로 아주 메말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자금을 쪼개서

유대인 단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했다.

비밀 예시바(율법학원)가 조직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유대인 작곡가의 곡만 연주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바르샤바, 우치, 빌나, 코프노(현재 리투아니아의 도시 카우나스)

게토에는 오케스트라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비밀 신문이 발행되고 회람되었다.

우치의 게토에서는 마치 중세처럼 연대기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게토의 역할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권한에 대해,

독일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토는 전쟁 수행에 소용이 닿는 한 최대로

이용할 뿐(우치에는 117, 비알리스토크에는 20 개의 작은 군수 공장이 있었다)이고

 강제 수용소로의 이송 명령이 떨어지면 질서 있게 이송할 수 있도록 협력시키는 것이었다.

 

 

 

폴란드 우치(Lodz)시 게토의 Zgierska거리 육교 - 1941년 2월

 

 

 

 

 

 

 

유태인의 표식인 육각별이 그려진 완장을 바르샤바 게토 거리에 팔러나온 유태인 소년 - 1941년

 

유태인들은 게토 구역에서 육각별이 그려진 표식의 완장을 항상 팔에 차고 다녀야 했다.

만약 게토내에서 유태인이 이 표식을 차고 있지 않다가

독일군에게 발견될시에는 바로 총살되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을 가능 하다라는 것은 기본적인 시장 경제의 원리이다. 

하지만 독일군으로 부터 목숨을 잃지 않기위해서 

육각별 완장을 물건 삼아 돈을 받고 동족에게 판매할수밖에 없는 형태를 보면

전시에는 그 어떤 형태의 물건일지라도 그때 그때 상황의

필요성에 따라 시장 경제가 형성될수도 있다 라는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볼수가 있다.

 

 

 

 

 

 

바르샤바 게토에 형성된 시장 - 1941년

 

 

 

바르샤바 게토내의 목공소

 

 

 

 

바르샤바 게토의 봉재 작업장 - 1941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레일을 하는 유태인 - 1941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시체 수급 처리원 - 1941년

 

 

 

 

 

 

굶주림과 고통에 찌들린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어린이들

 

 

 

 

 

게토 (ghetto) 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빈민가를 형성하며 사회,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기에 유럽에서 설치한 유대인 강제거주지역,

나치 독일이 만든 유대인 강제수용소, 미국에서 흑인 등이 사는 빈민가가 게토에 속한다.

 

 

 

바르샤바 게토의 은신처 벙커에서 독일군에게 사로 잡힌 유태인들 - 1943년 5월 8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봉기군 소탕 명령을 히믈러에게 받아 살륙작전을 펼치는 독일군 장교 유르겐 스트루프 - 1943년

 

 

 

유태인들의 무장 봉기가 일어난 바르샤바 게토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독일군 - 1943년 

 

 

 

바르샤바의 게토에 숨어 독일군에 저항하다 붙잡혀 호송되는 유태인 봉기군




 

 

 

독일군의 포격에 폭파된 유태인 봉기군의 벙커

 

 

 

 독일군에게 사살당한 바르샤바 유태인 봉기군

 

 


 


게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태인 인종 말살정책에 의하여 폴란드 바르샤바에

설치했던 유태인들의 격리구역으로 잘 알려져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박탈당하였다.

폴란드를 장악한 독일은 유태인 말살정책으로 다른 폴란드인과 유태인들을 격리시켜  

수도 바르샤바와 제2의 도시및 제3의 도시인 크라코프와 우지등지에 유태인 격리구역인 게토를 설치하였다.

이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발트해 3국과 백러시아의 민스크

소련의 카르코프등 여러곳에 유태인 격리구역인 게토를 설치했다.

 

 

1516년 이탈리아 베니스 시당국은 시내에 유태인이 거주하도록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게토라는 단어는 이 유태인 마을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16세기와 17세기 지방 정부로 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였던

 찰스 5세(Charles V)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부가 프랑크푸르트, 로마, 프라하에

이르는 많은 도시들에 이러한 유태인 마을의 설립을 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게토란 도시 내 (제한된) 구역으로서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이 곳의 비참한 환경에서 살게 하였다.

 게토는 유태인을 전체 사회의 비 유태인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유태인 지역 사회로부터도 분리하였다.

독일은 폴란드 내의 독일 부속 지역과 소련 내에만 적어도 1,000여 곳의 게토를 설립하였다.

독일 점령총독부는 1939년 10월에 피요트루크 트리부날스키에 폴란드내 첫게토를 설립하였다.

독일은 게토의 설립을 통하여 유태인들을 일시적으로 분리, 통치하고

궁극적으로는 베를린의 나치 정권이 유태인을 말살하고자 하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많은 게토들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어떤 게토는 실제로 단지 며칠 동안만 존재하였고 다른 게토들은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존재하였다.

1941년 말, “최종 해결(유럽 내의 모든 유태인을 살해하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자

 독일은 게토를 체계적으로 폐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그 부속국들은 게토의 주민들을 인근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총살하거나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대량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였다.

독일 SS와 경찰 당국은 소수의 게토 유태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갔다.

 

 

 

 

목숨을 보전하기위하여 나치 독일의 꼭둑각시가 된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경찰 - 1941년

 

 

 

게토에는 출입 제한 게토, 출입 허가 게토 그리고 파괴적 게토의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폴란드에서 가장 대규모의 게토는 바르샤바 게토였는데

여기에는 약 40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약 1.3 평방 마일의 넓이에 모여 살고 있었다.

다른 주요 게토들은 로츠, 크라쿠프, 비알리스토크, 르보브, 루블린, 빌나, 코프노, 체스토코바 및

민스크 등의 도시에 설립되어 있었다.

수만 명의 서유럽 유태인들 역시 동부의 게토로 강제 이송되었다.

독일은 게토 내의 유태인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배지와 완장을 차도록 규정하였고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 제국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게토에서의 일상 생활은 나치가 선임한 유태인 의회(Judenraete)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게토의 경찰력은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동시키는 것을 비롯한

 독일 당국과 유태인 의회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유태인 의회 위원과 같은 유태인 경찰은 수시로 변하는 독일 당국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은 이러한 독일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유태인 경찰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여러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게토의 제한 규칙에 저항하였다.

게토의 주민들은 소위 말하는 불법 활동에 자주 연루되었다.

 이때 불법 활동이란 음식물이나 약품, 무기나 정보 등을 유태인 의회의 승인 없이

또는 의회 몰래 밀반입하는 것들을 의미하였다.

게토의 주민이 생존하려면 이와 같은 생필품의 밀반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일부 유태인 의회와 의회 의원들은 이를 눈감아 주거나 은밀히 격려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유태인들의 종교적 행사에 대하여 큰 우려를 나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게토 내에서 이루어 지는 문화 행사나 청년단 활동 조차도 종종 “보안을 위협”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어떤 사회적 회합이나 그러한 시도 자체도 감금으로 연결되거나

회합 지도자와 참여자들의 살해로 이어졌다.

독일은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의 학교나 지속적 교육도 허가하지 않았다.

일부 게토에서는 유태인 레지스탕스 단원들이 무장 봉기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중 가장 대규모의 봉기는 1943년 봄에 이루어진 바르샤바 게토의 봉기였다.

이는 빌나, 비알리스토크 그리고 체트토코바와 다른 소규모 게토들의 유혈 봉기로 연결되었다.

1944년 8월, 독일 SS와 경찰은 로츠에 있었던 마지막 대규모 게토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헝가리에서는 1944년,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하고 점령하기 전까지는 게토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3개월 이내에 헝가리 헌병대는 독일의 제국 치안 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에서

파견된 추방 전문가들과 연합하여 약 44만명에 가까운 유태인들을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헝가리 전역에서 단기간의 “파괴적 게토”로 이동시킨 후, 헝거리 국경의 독일 검문소로 수송하였다.

독일군은 이러한 대부분의 헝가리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 학살 수용소로 보냈다.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당국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집(소위 말하는 다윗 왕의 별이 붙은 집)에 살도록 하였다.

1944년 10월 15일, 독일이 지원하는 파시스트 지도자 애로우 크로스(Arrow Cross) 운동이 집권한 수주 후,

애로우 크로스 정부는 부다페스트에 정식 게토를 설립하여

6만3천여명의 유태인들을 0.1 평방 마일의 지역에 모여 살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중립국 권력의 보호 아래 있다는 증명서를 지닌 약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국제 게토에 모여 살게 되었다.

1945년 1월, 소련이 부다페스트로 진입하면서 이 두 게토를 해방하여

거기에 살고 있던 9만명에 가까운 유태인도 동시에 해방되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게토는 나치가 유태인을 통치하고

그 존엄성을 짓밟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photo from : Yad Vas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