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독일공군 루프트바페에는 많은 전투기 에이스 조종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반기 이후에 연합군 공군에게 제공권을 빼앗기고 전쟁말기에 독일 본토가
연합군 폭격기의 드레스덴 폭격및 아헨 폭격등의 민간인 지역에 대한
융단폭격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처참하게 대량 학살 당하였다.
그러했던 부분의 한 이유는 독일의 영국에 대한 선제 민간인 지역 무차별 폭격에 있었으며
독일 본토 폭격을 위해 영국에서 출격하는 연합군 폭격기 대대를 상대로
공중에서 요격시킬수 있는 고속을 발휘하는 제트전투기의 양산을 제대로 못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의 우수했던 과학으로 항공기 역사의 발전을 앞당겼던
세계 최초로 제트전투기를 개발하여 놓고도 이를 양산할수 있는 시기를 그만 놓쳐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공군 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의 무지에 있었던 것이었다.
전쟁 초중반에 독일에는 하잉켈사에 의해 이미 제트 전투기가 개발되어 있었다.
독일 공군 최고의 사령관이자 국민 영웅으로도 불리우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히틀러에게
프로펠러 전투기 생산은 그만하고 제트 전투기들을 생산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멍청하게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에이스 였자 과거 형태의 프로펠러기에 집착한
괴링은 이를 반대했던것이었다.
히틀러는 괴링의 의견을 믿고 갈란트 중장의 제트기 기종 변경안을 묵살 시킨다.
나중에 히틀러는 자기자신의 멍청했었던 실책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려 히틀러가 후회했을때는 이미 전세가 거의 연합국측으로 기울어져 버리고 난 후였다.
그리고 연합군 세력의 대단위 물량 공격에 따라 독일 공군의 에이스들은 결코 연합군 공군력의 공세를 막아낼수 없었다.
흔히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에 헤르만 괴링이 아니라 밀히나 아돌프 갈란트가 공군 원수직을 맡았었다면
영국은 지금의 모습을 갖고 있지 못했을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돌프 갈란트와 독일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 1943년 9월
헤르만 괴링과 아돌프 갈란트
2차 세계대전 중반기때의 아돌프 갈란트 - 1943년
아돌프 갈란트(1912~1996)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장성이다.
독일어로 그의 이름은 아돌프 "돌포" 요셉 페르디난트 갈란트(Adolf "Dolfo" Joseph Ferdinand Galland)이며
그의 최종 계급은 중장(Generalleutnant)이었다.
독일의 중장(Generalleutnant)은 준장 계급이 없는 나치 독일군의 특성상 한국군과 미군의 소장 계급에 해당한다.
아돌프 갈란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성품으로 볼때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자는 결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전세가 완연한 패색으로 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을때
연합군 폭격기들에 의해 연일 독일 본토에 대량 살상의
폭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나치를 위해 연합군 공군과 전투를 벌였다기보다도
독일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분전했다.
첫 인상만 보면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인간말종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다.
사실 콧수염은 히틀러가 유행시킨 게 아니라 '히틀러가 당시 유행을 따랐던 것'이므로
클래식 취향으로 멋을 부렸던 갈란트 중장의 콧수염을 히틀러에 갖다붙이는 건 형평이 맞지 않다.
영국의 더글러스 베이더가 적십자기에 추락하는 전투기까지 악착같이 공격했던 자라면
아돌프 갈란트는 이미 승부가 끝난 입장인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라는 식으로
전시에 상상하기 힘든 대인배 스러운 풍모를 가진 신사적 스타일의 조종사였다.
또한 프로이센 군인의 유풍을 어느 쪽으로건 물려받은 인물로 미녀와 사냥,
좋은 담배와 술을 좋아하는 풍류남의 기질이 있는자이기도 했다.
담배는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빼도박도 못하는 골초였다.
애기의 콕핏에 재떨이가 설치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자기가 조종했었던 전투기인 Bf109의 마스코트는 담배를 피우는 미키 마우스였다.
아돌프 갈란트는 연합군 항공기 103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 공군 루프트 바페의 에이스 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기전에 독일 콘도르 군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베테랑 조종사였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을 지원한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스페인 폭격은 2
차 세계대전 발발전 독일 공군의 폭격 예행 연습 형태로 작용했었다.
아돌프 갈란테의 2차 세계대전 당시 계급은 대위였다.
아돌프 갈란트는 그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베르너 묄더스와 더불어 신생 루프트바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전쟁 말기로 가면 200기, 심지어는 300기 이상의 공인격추를 달성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즐비했던 독일이라
갈란트의 기록이 특출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아직 전쟁 초기라 숙련된 파일럿들이 다수 생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갈란트의 기록은 당시 루프트바페 전체에서 격추수 수위를 다투었다.
갈란트의 공식 격추 수는 104기로, 여기에는 JV-44 지휘 당시 Me-262로 기록한 7기 격추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전 중기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괴링의 미움을 받고 쫓겨난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를 대신해서
독일 전투기 부대의 총감을 맡아 마지막까지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를 이끌었다.
대전 말기에 가면 괴링의 미움을 받아서 최신예 Me-262FH 구성된 JV-44의 지휘관을 맡았는데,
이는 가서 죽어라는 괴링의 악의가 섞인 인사 배치였다.
그러나 괴링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갈란트는 오히려 이런 결정을 반기면서
루프트바페 굴지의 에이스들을 모아서 전무후무한 정예 부대를 설립했다
전후에는 추축국의 장성으로서 1947년까지 포로로 있다가 석방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 공군의 자문역으로 일했으며 석방 후에는 아르헨티나 공군에 초빙되어 항공산업 육성 관련 자문역을 맡았다.
전후에도 "나는 독일을 위해 싸웠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서 큰 논란거리가 됐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과 같은 형태의 격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서는 이례적으로 전쟁이 끝날때까지 살아남았다.
이때의 독일 공군에는 100기 격추 쯤은 우습게 넘기는 에이스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서 말하자면 연합군에 비해 전투 병력이 절망적으로 모자랐던
추축군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 에이스 조종사들은 전쟁 말기의 한계까지 싸우다가 전사해갔다
그는 총감직을 맡아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도 가끔 부하들과 함께 전투비행을 했으며,
항상 일선을 직접 돌아보면서 부하들의 고충을 진심으로 해결해주려 노력했다.
그 때문에 대전 말기의 독일 공군 장병들이 유일하게 신뢰를 보냈던 인물이며,
신사적이었지만 허세가 심하고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상관인 헤르만 괴링의 대립과 영국 공군의 "나무다리 에이스" 더글러스 베이더와의 우정이 유명하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갈란트에게 훈장을 달아주자, 마침 2대의 전투기가 상공을 날아갔다.
케셀링이 갈란트에게 비행기의 기종을 묻자, 갈란트는 "스피트파이어입니다. 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케셀링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제일 먼저 축하해 주는구만."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대립했다.
결국 히틀러도 아집을 꺾고 Me-262를 요격부대용으로 소수만 생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물론 히틀러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던 무지한 오판은 정식으로 이 제트전투기의 생산이 허가된 뒤에 여전히 무시당하였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쟁 말기에는 전투기 총감 직을 사임하고 Me-262 비행단장으로서 전투 일선에 출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Me-262를 탑승했던 소감으로 "천사가 밀어주는 비행기를 탑승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직접 그를 만나서 여러날 이야기를 나눈 끝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베이더가 "나한테 Bf-109 전투기를 조종할수 있게만 해준다면 원이 없겠네." 하고
농담 비슷한 말을 건네자 갈란트 역시 웃으면서 "만약 내가 자네한테 Bf- 109 전투기를 주면
자네는 그걸 타고 곧장 영국으로 날아갈테고,
그러면 나는 자네를 쏠 수밖에 없잖나?" 하고 거절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의 앞에 나타나 전쟁포로 신세가 된 갈란트에게 시가를 건네준 사람도 베이더였고,
("나는 독일을 위해 싸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을 한 뒤에
국제적인 비난에 휩싸이자 베이더가 직접 나서서 그를 변호해줬다고 한다.
지금도 두 사람의 후손들은 교류를 통해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전후에는 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군 자문역 등을 지내다가 1996년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어드바이저로 참가해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전략 재현에 대해 조언을 했다.
물론 영국의 유명 에이스인 로버트 스탠포드 턱도 어드바이저로 참가했었다.
저서로는 자서전 <Die Ersten und die Letzten(처음과 마지막)>이 있다.
1934.5.1 : 공군 사관후보생-하사(Fahnenjunker-Unteroffizier)
1934.9.1 : 사관후보생(Fähnrich)
1935.1.1 : 소위(Leutnant)
1937.8.1 : 중위(Oberleutnant)
1939.10.1 : 대위(Hauptmann)
1940.7.19 : 소령(Major)
1940.11.1 : 중령(Oberstleutnant)
1941.12.4 : 대령(Oberst)
1942.11.1 : 소장(Generalmajor)
1944.11.1 : 중장(Generalleutnant)
시기 미상 : 전상장 흑장
1939.6.7 : 스페인 전역 참전 기념 다이아몬드 금십자 훈장
1939.9.15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1940.5.22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1940.7.29 : 기사 철십자 훈장(96번째 서훈)
1940.9.24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세 번째 서훈)
1941.6.21 : 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첫 번째 서훈)
1942.1.28 : 다이아몬드 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두 번째 서훈)
최종격추기록 : 104기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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