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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가졌던 영욕의 한세월[Benito Mussolini,s honor and disgrace times]

슈트름게슈쯔 2012. 10. 3. 11:07

 

 

베니토 무솔리니(1883~ 1945)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독재자 였다.

 그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192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국무총리였다. 

1925년부터 무솔리니는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936년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또한 무솔리니는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 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후 도주하여 망명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그 수반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국가주의,협동조합주의,생디칼리즘,팽창주의,사회진화론,반공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 이념들을 조합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를 막기 위한 검열의 필요성을 선전하였다.

1924년부터 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라 불리던

로마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무솔리니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1935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 이탈리아 조약을 채결하는 등

프랑스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1940년에 들어 외교적 위치를 바꾸어 추축국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뒤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1945년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무솔리니를 환호하는 젊은 파시스트 검은 셔츠단  - 1935년 로마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68회 생일 방문으로 로마 왕궁에 들른 무솔리니 - 1937년 11월 1일

 

 

 

 

 

 

 

 

 

무솔리니 특유의 득의양양한 포즈

 

 

 

로마를 방문한 히틀러 - 1938년

 

 

 

 

뮌헨 회담 당시 만났던 무솔리니와 히틀러 - 1938년 9월 28일

 

 

 

 

유럽 추축국의 두 독재자 - 1940년 6월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독일 뮌헨 회동 - 1940년 6월

 

 

 

사열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 1941년 9월

 

 

 

 

파시스트식 경례를 붙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이탈리아 전함 줄리오 체사레의 수병들을 사열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이탈리아 해군을 자랑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함대를 운용할 연료조차 불충분 하였다.

 

1941년 2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지도 반년 정도 지난때 

개전 이후부터 이탈리아의 전쟁은 시행착오와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행착오와 재앙은 육, , 공 삼군 중

그나마 가장 준비가 잘 되어있다고 평가되었던 해군 역시 그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해군을 선전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이 개전 이후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1년 11월 11일 저녁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잊을수 없는 밤이 되었다.

궁핍한 국고를 지원하여 마련했었던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의 구식 뇌격기

소오드 피쉬 12대에 의해서 순식간에 괴멸되어 버린다.

 

 

 

 

어정쩡했던 이탈리아의 소형 경전차였던 CV-33 에 올라서서 포즈를 잡는 무솔리니

 

 

 

나치의 룬트슈데트 원수와 무솔리니와 히틀러 - 1941년 8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의 이슬람 족장으로 부터 검을 전달 받는 무솔리니

 

 

 

히틀러의 명령으로  오토  스코르제니 특공대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 - 1943년 9월 이탈리아 그란사쏘 캄포 호텔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무솔리니 - 1944년

 

 

 

무솔리니의 정부였던 클라라 페타치

 

클라라 페타치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로서 처형 당했을 때 무솔리니 보다 29세나 젊은 33살이었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파시스트 당의 심복들과 함께 함께 독일군 상사로 위장하고

독일군을 따라 스위스로 도주하다가 코모 호반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파르티잔들에게 체포되었다.

공산당 빨치산들은 28일 이들을 처형하고 29일 그 시체들을

밀라노로 운반을 해와 어느 주유소에 정육점의 갈쿠리에 매달아 전시하였다.

이 끔찍한 20세기 추축국의 한 독재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세기적으로 유명한 뉴스 보도의 초점을 받았다.

무솔리니와 같이 전시된 다른 시체들은 그와 같이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던 무솔리니의 추종자들이다. 

무솔리니나 페타치등의 시체가 심하게 훼손 된 것은 빨치산들이

이들 시체들을 군중들에게 내주고 돌 팔매질과 발길질을 하게 허용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라 페타치는 교황의 주치의였던 의사 아버지를 둔 상류 가정의 딸이었는데

바람직하지 않은길을 걷다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성난 군중들의 발길질에 짓이겨져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버린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

 

 

 

처형 후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

 

 

 

처형후 수거된 두개골이 파열된채 얼굴이 짓이겨진 무솔리니의 사체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카톨릭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스 11세는 1922년 “무솔리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라고 극찬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무솔리니 선거에서 승리했다.
교황이 무솔리니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막대한 경제, 정치적 거래 때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1929년 2월11일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라 바티칸 궁전과 라테란 궁전, 그리고 그 부속지 등을 소유하는 바티칸 市라는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바티칸 市는 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을 모두 면제 받았다.

게다가 옛 교황령과 재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탈리아로부터 보상금 7억5천만 리라와

연 5%의 이익이 보장된 이탈리아 공채를 받았다.

카톨릭의 나라에서 교황청의 후광을 입은 무솔리니의 파워는 막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꿨던 무솔리니는 엄청난 겁쟁이였다.

그는 아내를 무서워했던 공처가였고, 밤이면 혼자서 아무데도 못가는 겁쟁이였다.

무솔리니는 또 지저분하기로 유명했는데, 목욕하는 것과 속옷 갈아입는 것,

그리고 면도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10대 때부터 여자는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여러 명의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14명의 여성과 동시에 관계를 가졌던 적도 있다.) 그 덕분에 그는 매독에 걸렸다.

무솔리니는 자신이 매독에 걸린 것을 알고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야사(野史)에는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손을 잡고 무모한 전쟁에 뛰어든 이유가

뇌 속에 매독 균이 침투해 올바른 상황 판단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1945년 4월25일 反파쇼 의용군(이탈리아 빨치산)에게 체포된 후 무솔리니는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정부(情婦)인 클라라는 총살당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위 사랑하는 무솔리니와 함께 죽겠다고 애원했다.

참고로 클라라는 성관계가 문란했던 무솔리니보다 29살이나 젊었다.

1945년 4월28일 총알이 무솔리니를 향해 발사되었을 때 클라라는 온몸을 던져 무솔리니를 감싸 안았다.

 클라라가 죽고 난 뒤 무솔리니는 9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두 사람의 시신은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죽은 무솔리니의 얼굴에 오줌을 누었다.

한 여인은 자신의 살해당한 다섯 자녀의 복수를 위해 무솔리니의 시신에 총을 다섯 차례에 걸쳐 쐈다.

마침내, 두 사람의 훼손된 시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거꾸로 매달렸다.

군중들은 수 시간에 걸쳐 비웃음을 던지고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 날 무솔리니의 시신은 프레다포에 있는 가족묘에 묻혔다.

사람을 많이 죽인 독재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필요가 있다.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필요로 한다.

 이는 자유의 근본 속성이자 거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나 현재나 사악한 인간들의 속성중의 한가지는

자기가 지은 죄를 덮어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죄를 저지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권 탄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부류는 죽는날까지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류는 한세월을 지속적으로 살아오면서 여러국가, 여러 단체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자와

그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이든지 사악한 형태의 범죄를 저지르는 나쁜 무리들을 누누히 보아왔다.

비록 그러한 죄업이 자기대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제나 역사의 올바른 평가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인한 형태로 후대에 두고 두고 회자가 되게  된다.  

 

 

 


 

 

 

 

 

photo from : sfg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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