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따발총의 유래와 따발총 김영하[Korean Nickname DabalChong PPSh-41 Submachine Gun & Comedian Kim Young Ha]

슈트름게슈쯔 2012. 10. 16. 11:17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북한 공산군대의 남침에 의한

6.25 동란을 생각하면 우리는 겨레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남한을 침략하여 내려온 인민군들의 대표적인 무기는 소련제 따발총이었다.

따발총이라 불린 PPSh-41 기관총은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소련제 기관단총이다.

그런데 따발총에서 ‘따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희승 (李熙昇 : 1896 ~1989)

 

 

 

국어 대사전(1961년 문학 박사 이희승 편,민중서림 발행)

 

 

일부 남녘의 국어 사전에서는 따발총과 비슷한 말로 ‘다발총’(多發銃)을 들기도 하는데

‘따발’과 ‘다발’(多發)은 관련이 없다.

따발총이 처음 실린 남녘 국어 사전은 1961년 12월 발행된 〈국어 대사전〉(이희승 편)이다.

당시 6.25 사변 이후의 최신 낱말을 상당히 빨리 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북녘 국어 사전에서는 1962년 10월 발행된 〈조선말 사전〉(5)에서 확인된다.

‘따발’은 ‘똬리, 또아리’의 함경도 방언이다.

 

 

 

PPSh 41 기관단총의 둥근 모양의 드럼식 탄창

 

 

 

따발총에는 총알을 한발씩 계속 넣어 70발 까지 채워 넣을수 있는 둥글납작한 탄창이 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똬리, 또아리’와 닮았다고 해서 따발총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따발총이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을 빨리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는 것을 입에서 말을 발사하는 것으로 보면,

그 속도가 빠르고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따발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똬리와 또아리는 ‘물동이와 같은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얹는 물건’,

‘구렁이가 몸통을 둥글게 빙빙 틀어 놓은 모양’을 뜻한다.

현재 ‘똬리’는 표준어로, ‘또아리’는 비표준어로 치는데,

 발음으로 잘 구별되지 않고 둘 다 널리 쓰인다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

 

 

 

 

 

구 소련의 PPSh-41 기관단총. 6·25 당시 북한군 보병사단은 흔히 ‘따발총’이라

불리는 이 기관단총을 2,100여 정 정도씩 보유했다. 현재 국내의 각종 안보 기념관에 20정 이상이 남아있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국군 노병들의 회고담에서부터 30여 년 전 수많은 시청자들을

흑백 브라운관 TV 앞에 불러 모았던 드라마 ‘전우’에 이르기까지

 북한군 보병의 휴대 무기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총이 속칭 ‘따발총’이다.


 

‘따발총’의 정체는 다름 아닌 PPSh-41라는 구 소련제 기관단총(Submachine Gun)이다.

PPSh-41은 다른 소련 무기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대량생산에 용이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 만 정이 생산됐을 만큼 소련군의 베스트셀러 기관단총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북한군 보병의 주력 무기처럼 흔하게 등장하지만

실제로 북한군 보병의 주력 총기는 아니었다.

 6.25 개전 초반을 기준으로 약 1만여 명 내외로 구성된 북한군 보병사단에서

 

권총만 휴대한 장교들이 1300여 명,

보병소총은 5900여 명,

기병소총은 2150여 명,

‘따발총’은 2100여 명의 병력이 휴대했다.


 

 

PPSh 41 기관총의 7.62mm 토카레프 총알 71발들이 탄창

 

 

이처럼 ‘따발총’의 보유 비율이 높지 않았음에도

주력 소총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만큼 무척이나 인상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PPSh-41처럼 탄창에

무려 71발의 총알이 들어가는 소총이나 기관단총은 흔하지 않았다.

71발이라면 짧은 교전에서는 탄창 교환 없이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수량이다.


 

 

 

 

별명이 따발총인 코미디언 김영하

 

 

왕년에 대한민국에서 속사포 처럼 쏟아내는 재치만담으로

'따발총' 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 여성 코미디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코미디언 김영하씨 였다.

 

 

2008년 호주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호주에 장기간 거주했어요. 다시 돌아오니 너무 좋네요."라고 했다.
당시 한동안 브라운관을 떠나있던 그녀는 환갑이 넘은 나이로 다시 시청자 곁에 돌아왔다.

김영하씨는 한때 탈모 등 건강상의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2008년 '남희석 최은경의 여유만만' 등 TV 아침토크프로그램에 잇달아 출연한

 그녀는 "자살까지 생각할 만큼 우울증이 심했다"고 털어놓아 눈길을 끌었다.
이어 2008년 9월 19일 저녁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가진

코미디언 대화합잔치에서 모처럼 얼굴을 내민

김영하씨는 "폐경기 이후 자고 나면 빠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면서 "탈모를 극복하고 나니

저절로 우울증도 사라지고 웃음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김영하씨는 어릴때 나이가 9살이었던 1950년에 일어났던 6,25 전쟁의 참화로 

 양친 부모님을 다 여의고 작은댁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살기 위해서  학교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아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배울려고 노력했고  무슨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며 

살아 갈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서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고  텔레비젼이 나오게 되자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쏟으며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첫 배역을 맡게된데 까지 파란 만장한 삶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별명이 따발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원로 코미디언 김영하씨.

아무도 그녀가 6.25 사변에 의한 전쟁고아로  어릴때부터 소녀가장으로

살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영하씨는 어릴때부터 힘들게 살아온것도 있지만

살면서 알뜰히 살기로 소문이나  알뜰 주부상을  여러번 받기도 했고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지금도 호주에서 이사가는 분들이 챙겨줄 정도로  알뜰히 살고 있다.

 

어릴때부터 함께 자란 남동생과 오빠도 지금은 제각기 선생님으로서 교직에 몸담고 있고

사업가로써 사회에 이바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연예인 활동을 하면서 번 수입금으로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10명씩에 대하여 

10년 이상을 계속 자동이체 시켜서 도와주는 선행을 베풀며 살아왔다. 

 

 

 

불교 집회에 참석한 김영하씨 - 2011년 4월 6일

 

 

이제까지 남을 돕고 살아온 김영하씨는 2012년 올해 나이가 72세 이지만

외모와 총기는 여전히 40대 같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동료 코미디언들과

공연을 같이 하며 늘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photo from : hungari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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