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Air Force

진주만 기습의 응징 폭격이었던 일본 본토 둘리틀 공습[The Attack on Pearl Harbor U.S Response Bombing Japan Doolittle Raid]

슈트름게슈쯔 2013. 1. 8. 01:56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본토를 공습하기 위해 태평양의 일본 근해쪽으로  항진하는 미 항모 호넷 갑판의 B-25 미첼 폭격기 편대

 

 

 

미 항모 호넷 함상의 제임스 둘리틀 대령과 B-25 미첼 폭격기 대원들

 

 

 

일본인들에게 미국인들이 받았던 기념품 메달을 돌려주기 위해

 

도쿄로 배달되는 폭탄에 메달을 매다는 제임스 둘리틀 대령 - 1942년 4월 18일

 

 

 

 

 

 

 

항모 호넷에서 발진하는 B-25 미첼 폭격기 -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 상공으로 접근한 미 공군의 B-25 미첼 폭격기

 

 

 

미 공군 B-25 미첼 폭격기의 도쿄 폭격후 부서진 공장의 잔해물을 살펴보는 일본군 - 1942년 4월

 

 

 

중국에 불시착한 B-25 미 공군 폭격기의 조종사 들을 국민당 군대로 에스코트하는 중국인들

 

이들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인들의 본토를 폭격했던 미군 조종사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이후 일본군들은 4개월 동안 미군에 협조한 중국 저장성과 장수성 일대의 마을에 보복 공격을 가하여

중국인 25만명을 학살시켰다.  

 

 

 

일본군에게 붙잡힌 미군 조종사 Robert L.Hite - 1942년

 

 

 

미국 노스아메리칸 항공기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4월 18일 일본 도쿄에 대한 답례의 도쿄 폭격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언급했던 폭격기가 발진했던 미지의 장소인 샹그릴라는

여기에서 생산되었던 폭격기였다고 연설하는 제임스 둘리틀 대령 - 1942년 6월 1일

 


 

 

 

1942년 4월 1일 16기의 B-25 미첼 폭격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과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것은 일본의 야만적인 진주만 기습에 대하여 분노한 미국인들을 대표하여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내린 단호했던 일본 본토에 대한 응징 폭격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의 지휘관은

미 공군의 제임스 둘리틀 대령이었다.

일본 본토 공격의 예정 전날인 4월 17일에 

미해군 함선 레이더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 중에 일본군의 감시정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 호가 포격으로 격침시켰고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 했다.

 발진 예정 해역 앞에 예상 외의 원거리에서 일본군에게 발견이 되어버려

폭격대는 예정보다 빨리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시켰다.

그리고 내슈빌은 또 1척의 일본 감시정을 격침시켰다.

일본 본토로부터 약 600마일까지 접근한 미해군 항모 호넷(Hornet)의 비행 갑판에서는

16대의 B-25 미첼(Mitchell)쌍발 폭격기들이 차례차례 이함하여 발진했다

그리고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H. 둘리틀(James H. Doolittle)대령이 지휘하는

B-25 폭격기 편대는 저공으로 일본 본토로 접근하여 도쿄, 오사까,나가사키, 고베 등

일본의 주요 도시를 동시에 폭격했다.

일본 측에는 50명의 사망자, 가옥 262호의 피해가 나왔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대한 미국의 보복 반격으로 이루어진

이 공습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일본의 요격기 조종사들이 이를 갈면서 하늘로 올라왔을 때는

B-25들은 이미 중국 쪽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일본은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쇠망치로 호되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있던 당시 일본인들로서 일본 본토,

그것도 천황이 거주하는 황실이 있는 도쿄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국 폭격기에게 공습을 당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쌍발 폭격기 16대가 투하한 폭탄의 양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수도 도쿄가 폭격 당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B-25 폭격기들은 폭격후 일본 열도를 횡단하여 중국 동부에 착륙했다

(B-25 폭격기 1기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 착륙했고, 승무원은 억류되었다).

승무원은 전사가 1명, 행방 불명이 2명, 포로가 8명으로, 나머지는 미국으로 귀환했다.

 일본 대본영은 이 피해를 "적기 9기를 격추했으며, 손해는 적다"고 포장해 발표했다.

그러나 폭격 당일의 날씨는 맑았으며, 추락한 항공기 등 시민에게서는 단 1기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대본영의 발표에 대해 "웃기지 마라. 황군은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승무원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혐의에 대해 포로가 아닌

 전쟁범죄자로서 다루어져 조종사 2명과 사격수 1명이 처형되었으며, 5명은 징역을 살았다.

미국은 제네바 협약을 어긴 사형에 대해 "야만적인 만행"이라고 비판했으며,

 20세기 폭스사는 1944년에 선전 영화 퍼플 하트에서 이들을 다루었다.

이 공격을 보고받은 후에, 본토 방공을 맡고 있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관은 충격을 받았다.

진주만 공격에서 공격을 면한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1942년 초반부터

이미 크고 작은 섬들에 대해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 본토 공습 이후

야마모토 장관이 일본 본토의 안전 확보를 위해 미군 항공모함 섬멸을 위한

교두보로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의 실행을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일본 육군은 둘리틀 공습의 재발을 막기 위해 작전에 이용된 저장성 이남의

중국군의 비행장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파견군에 명령하여 파괴 작전을 실시했다.

작전은 1942년 5월 중순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되어 동원 병력 약 18만,

비행기 3개 비행 전대에 의해 목적 비행장의 파괴와 같은 곳을 방어하는

구주퉁이 지휘하는 중국 제3전구군 34개 사단을 격퇴하는 것에 성공한다.

작전은 1942년 9월 30일에 종료되었다.

둘리틀 공습은, 일본의 수도 방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동부 군사령관 나카무라 코타로 대장은, 육군 방공 학교 및 고사포

 제 7 연대의 고사기관포를 황궁 주변에 배치해,1942년 4월 20일에,

 독립비행 제 47 중대를 방위 사령관의 지휘하에 두어 수도 방공을 맡겼다.

일본군에서는, 이를 위한 비행장으로서 나리마스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본의 본토 타격은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의 실패 이후로

 한 번도 직접 타격을 받은 적이 없다.

 (조선초 대마도 정벌을 당하였지만 일본 본토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본 본토 직접 타격은 의의가 크다 볼 수 있다.

 

둘리틀 공습의 성공은 곧바로 미국 본국에서도 선전되었지만, 작전의 내용은 함구되었다.

항공모함 호넷의 이름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자 회견에서

공습의 성공을 발표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단으로부터

[폭격기는 어디에서 발진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발진지는 샹그릴라]라고 대답했다.

샹그릴라는 당시의 소설로 영화화도 된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히말라야 부근에 있는 가상의 지명인데,

그것을 모르는 기자는 [폭격기는 항공모함 샹그릴라로부터 발진]

이라고 오역해 일부에서 잘못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후일 사실로 이루어져

실제로 항공모함 USS CV-38 샹그릴라 (에섹스급 항공모함 중 1척)가 취역하였다.

 

 

 

 

 

 

 

 

 

 

 

 

photo from : The Atlan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