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4년간의 미군정이 끝난 직후 미국 문화의 영향에 의한 레인저 복장의 어린이
부피가 큰 짐을 머리에 얹어 무게중심을 잡고 이동하는 여성들
가마니 푸대 진지위에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시 노획한 무기들중
인계받은 일본제 공랭식 7.7mm 92식 중기관총과 대검을 꽂은
일본제 아리사카 99식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경계 근무를 서는 서울 경찰들
드럼통을 잘라 해머로 두드려 펴서 용접시킨후 페인트를 발라 제작한 택시 대용의 운송 수단이었던 마차 객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툼한 솜바지를 입고 장사를 하는 여성과 나무상자로 만든 가판
흰수염 노인의 가판 잡화점
노인의 뒤로 보이는 칠 간판 골목안이라 적힌 간판과 삼평여관과 한원여관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을지로 입구의 광통관 - 현재는 이 건물중 한채만 남아 존재한다.
당시에는 손목시계보다 양복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회중시계가 유행했었던데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사슬이 달린 회중시계가 진열되어 있는것을 살펴볼수 있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조선독립군 의열단의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간
윤봉길 의사는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왕의 생일에 모일 상하이 주재 일본군 장교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거사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 거사를 치르기 전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새 회중시계를
백범 김구선생의 낡은 회중시계와 바꾼다.
선생님의 회중 시계가 오래 되어서 많이 낡았군요 .
제것은 새것인데 저는 이것이 필요없으니
이제부터 이것을 쓰시고 선생님께서 쓰시던 낡은것을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것은 윤봉길의사가 목숨을 던지러 가는 마당에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새 회중시계가 필요없으니
새것과 헌것을 서로 바꿔 쓰자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국심과 애국심을 나누는 김구에 대한 윤봉길 의사의 결의에 찬 의식이었다.
거리의 담배 노점상
당시는 담배 제조기술이 없어서 미제 양담배를 받아 팔았으며 꽁초를 주워 봉지에 넣어 파는 봉초를 팔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우체국이라고 불렸던 옛 중앙 우체국
적벽돌의 청동 지붕으로 제작된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던 이 건물은 미적 가치가 있었으나 1년뒤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화신그룹의 박흥식씨에 의해 세워진 이 백화점은 장안의 명소였다.
이 백화점은 서울속에서 광복과 전쟁 혁명과 경제 발전을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증인과도 같았다.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지금은 헐려 없어졌고 현재 이곳에는 밀레니엄 빌딩이 들어서 있다.
청계천
건물 앞에 노점을 편 사진사와 칼과 가위 가는 사람및 구두 수선공과 지겟군및 엿장수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관 - 뒷 배경은 남산
서울역앞 대동 예식장과 멀리 보이는 남대문
이발소와 양복점 간판 - 당시는 대부분 한문 글씨로 적힌 간판들이었다.
용산 공공기관 지점 앞의 가판 노점상
종로에서 설렁탕을 팔던 식당과 그 앞의 노점상
사진관과 세탁소와 양복점
푸줏간에 도살한 고기를 나르는 마부 청년 - 힘든 일을 하는 청년의 팍팍한 삶을 엿볼수 있다
조선시대에 소나 돼지를 도살하는 직업의 백정과 말을 모는 마부들은 신분이 비천한 천민 계급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소나 돼지를 잡는 도축업자들및 푸줏간에서 육고기를 가공하는 사람들은
해방이후 오랫동안 사회에서 그렇게 선호하는 부류의 직업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그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 또한 완전히 바뀜에 따라
현재는 소나 돼지를 도축하거나 육우와 욱돈을 가공하는
푸줏간 사업이나 축산물의 가공일에 종사하는 직업군은
상당히 높은 수익과 보수를 보장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이기에
젊은이들이 대단히 선호하는 직업군중의 하나이며
국민들의 식문화에 지대한 기여와 이바지를 하는 사회의 중산층 계열이기도 하다.
옹기 장터 앞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는 여성
장터의 수수떡 호떡 장사와 화물 자전거위에 철망으로 엮은 나무 상자속에 가두어 놓은 닭을 파는 닭장사
장터의 반찬 가게
장터의 무와 배추 더미
6.,25 동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 평화로웠던 인천 도원동 배다리 마을 장터 풍경 - 194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