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서울 1949년 - 한국전쟁 6.25 동란 1년전의 모습[Korean War 1 Years Ago 1949 Seoul City View]

슈트름게슈쯔 2013. 3. 18. 21:46

 

 

해방 이후 4년간의 미군정이 끝난 직후 미국 문화의 영향에 의한 레인저 복장의 어린이

 

 

 

부피가 큰 짐을 머리에 얹어 무게중심을 잡고 이동하는 여성들

 


가마니 푸대 진지위에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시 노획한 무기들중 

인계받은 일본제 공랭식 7.7mm 92식 중기관총과 대검을 꽂은 

일본제 아리사카 99식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경계 근무를 서는 서울 경찰들  


 

 

드럼통을 잘라 해머로 두드려 펴서 용접시킨후 페인트를 발라 제작한 택시 대용의 운송 수단이었던 마차 객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툼한 솜바지를 입고 장사를 하는 여성과 나무상자로 만든 가판

 

 


흰수염 노인의 가판 잡화점

 

노인의 뒤로 보이는 칠 간판 골목안이라 적힌 간판과 삼평여관과 한원여관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을지로 입구의 광통관 - 현재는 이 건물중 한채만 남아 존재한다.

 

 


5사단 본부의 나무 팻말

 

 


현재 우리은행의 전신인 조선상호은행 종로지점과 땔감 수송용 달구지를 멈추고 여물을 먹는 소

 

 


진열장을 콘크리트와 타일을 붙여 제작한 옛날의 시계포

 

당시에는 손목시계보다 양복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회중시계가 유행했었던데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사슬이 달린 회중시계가 진열되어 있는것을  살펴볼수 있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조선독립군 의열단의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간

윤봉길 의사는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왕의 생일에 모일 상하이 주재 일본군 장교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거사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 거사를 치르기 전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새 회중시계를

백범 김구선생의 낡은 회중시계와 바꾼다.

선생님의 회중 시계가 오래 되어서 많이 낡았군요 .

제것은 새것인데 저는 이것이 필요없으니

이제부터 이것을 쓰시고 선생님께서 쓰시던 낡은것을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것은 윤봉길의사가 목숨을 던지러 가는 마당에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새 회중시계가 필요없으니

새것과 헌것을 서로 바꿔 쓰자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국심과 애국심을 나누는 김구에 대한 윤봉길 의사의 결의에 찬 의식이었다.

    

 

 

 

거리의 담배 노점상

 

당시는 담배 제조기술이 없어서 미제 양담배를 받아 팔았으며 꽁초를 주워 봉지에 넣어 파는 봉초를 팔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우체국이라고 불렸던 옛 중앙 우체국

 

적벽돌의 청동 지붕으로 제작된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던 이 건물은 미적 가치가 있었으나 1년뒤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고 말았다.

 

 

 

종로 화신백화점

 

일제 강점기 화신그룹의 박흥식씨에 의해 세워진 이 백화점은 장안의 명소였다.

이 백화점은 서울속에서 광복과 전쟁 혁명과 경제 발전을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증인과도 같았다.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지금은 헐려 없어졌고 현재 이곳에는 밀레니엄 빌딩이 들어서 있다. 


 


6.25 동란 1년전의 온전했었던 남대문과 좌측의 남대문 파출소 앞을 지나가는 곡물 수송 말 달구지

 

 


UN 위원회 환영 간판

 

 

청계천

 

 

 

삼각지 근처의 미 8군 기지 주변 - 미군은 1949년에 철군을 한다

 

 

 

서울역 앞의 대동 예식장과 사진관

 

 

 

건물 앞에 노점을 편 사진사와 칼과 가위 가는 사람및 구두 수선공과 지겟군및 엿장수 

 

 

 

 

분수대속의 결빙된 빙판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당시 짐운반 인력꾼으로 활약했던 지겟꾼

 

 

 

 

 32사단 앞 도로 

 

 


제일연합본부라고 쓰인 간판이 보이는 도로변 드럼통위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관 - 뒷 배경은  남산

 

 


이삿짐을 나르는 지겟꾼과 적벽돌담 너머로 보이는 남산

 

 

 

추운 한대에서 목도리를 머리까지 감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여성 

 

 

 

 서울역앞 대동 예식장과 멀리 보이는 남대문

 

 

이발소와 양복점 간판 - 당시는 대부분 한문 글씨로 적힌 간판들이었다.


 

 

 용산 공공기관 지점 앞의 가판 노점상

 

 


플라스틱 물자가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 대부분 목재를 이용하여 만든 상점의 문과 매대및 노점상의 가판

 

 


서울 시가지 서민의 발이었던 109호 전차

 

 

 

종로에서 설렁탕을 팔던 식당과 그 앞의 노점상

 

 

 

사진관과 세탁소와 양복점


 

 

 

 

푸줏간에 도살한 고기를 나르는 마부 청년 -   힘든 일을 하는 청년의 팍팍한 삶을 엿볼수 있다

 

조선시대에 소나 돼지를 도살하는 직업의 백정과 말을 모는 마부들은 신분이 비천한 천민 계급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소나 돼지를 잡는 도축업자들및 푸줏간에서 육고기를 가공하는 사람들은

해방이후 오랫동안 사회에서 그렇게 선호하는 부류의 직업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그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 또한 완전히 바뀜에 따라

현재는 소나 돼지를 도축하거나 육우와 욱돈을 가공하는

푸줏간 사업이나 축산물의 가공일에 종사하는 직업군은

상당히 높은 수익과 보수를 보장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이기에

젊은이들이 대단히 선호하는 직업군중의 하나이며

국민들의 식문화에 지대한 기여와 이바지를 하는 사회의 중산층 계열이기도 하다. 

  

  


시장통의 막걸리 대포집 

 

 

옹기 장터 앞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는 여성

  

 

 

장터의 수수떡 호떡 장사와 화물 자전거위에 철망으로 엮은 나무 상자속에 가두어 놓은 닭을 파는 닭장사

 

 

 

장터의 반찬 가게

 

 

 

장터의 무와 배추 더미

 

  

 

6.,25 동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 평화로웠던 인천 도원동 배다리 마을 장터 풍경 - 194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