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 매달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Auschwitz Concentration camp commandant Rudolf Hoess hanging]

슈트름게슈쯔 2013. 8. 28. 19:49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정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가운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일군 장교와 여성 간수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유태인 희생자들의 신발

 

  

 

나치의 만행으로 끔찍하게 불태워진 독일 정치범들의 사체 - 1945년 4월 독일 가데레겐

 

 

나치에 의해 산채로 불태워져 끔찍하게 사망한 150명 정치범들의 시체

나치 독일군은 진격하는 미군에 의해 해방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악마적인 홀로코스트 행위로 4일전 창고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독일 SS 경비병 들은 진격중인 미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수감자들을 불태우려 죽이려고 했다.

창고 바닥에는 150구 가량의 시체가 있다.

이 만행의 현장은 1945년 4월 17일 독일 가데레겐(Gardelegen)을 접수한

미 9군의 병사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위의 사진을 보면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조선의 수원 제암리에서 만행을 자행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종전후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루돌프 회스

 

 

원래 폴란드의 오시비엠침(아우슈비츠)은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한 형무소로 계획되어

1940년 4월 루돌프 회스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독일공산당 정치범 30명과 점령지인 폴란드의 정치범 728명을 인계받았다.

1941년 8월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수용소를 방문해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총통은 유태인들에 대해 '최종 계획'이라는 결단을 내렸다"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태인 절멸 용도로 개축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회스는 훗날 "이 명령에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서도

 "나는 굳이 심사숙고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명령이니까, 실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증언했다.

회스는 "총살로는 명령하신 숫자를 제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며

"이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큰 정신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일단 항변했다.

그러자 히믈러는 "어리석긴. 가스를 사용하여 죽이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명했다.

 

이에따라 1941년 10월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가스를 통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특별히 집행자들의 양심적 가책이나 정신적 부담을 가볍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회스 본인부터가 "학살이 시작된 뒤 나는 일에서 행복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부하들을 믿을 수 없었고, 상관들은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으며

내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며 "모두들 '소장만 호의호식한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별로 선망할 것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가 목 매달렸던 교수대 - 2013년 4월

 

 

 

 

 

 

 

교수형 밧줄을 피하려는 루돌프 회스의 마지막 본능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매달린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 - 1947년 4월 16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회스는

1946년 4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출석해 유태인 250만명 학살설을 주장했다.

5월 폴란드로 인도된 회스는 7월부터 크라쿠프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해

1년후 1947년  4월 2일 폴란드 최고인민법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지내에 새로운 교수대는 회스의 사형 선고 뒤에  만들어졌으며 

보름후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 초대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자신이 수용소장을 지낸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교수대는 회스를 교수형에 처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회스 이외의 누구도 그 교수대에서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회스의 교수대라 불리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photo from : collections.yadvashem.org

                                elsilenciodelaverdad.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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