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미국 타임지 1943년 커버 일본 나가노와 나가토[Time Magazine 1943 Cover Japanese Nagano & Nagato]

슈트름게슈쯔 2014. 3. 19. 14:51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야마모토 이소로꾸의 기함이었던 나가토 



나가토는 일본 해군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자 세계 최초의 16인치급 주포 탑재 전함이었다. 

이 전함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조약 체결 직전에 완성된 전함치고는 

상당한 명품이었으며 88함대 계획의 제1번함으로 준공되었다.

나가토는  태평양 전쟁 초기 야마토가 등장할 때까지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활동했으며 

진주만 공습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기함으로서 진주만 기습 공격의 신호를 보냈다. 

나가토 함명의 유래는 일본의 과거 국가 중 하나였던 나가토(長門국)에서 유래했다.

 자매함으로는 무츠(陸奧)가 있으며 무츠 또한 일본의 나라 이름에서 따왔다.

전함 나가토가  세운 전과는 없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해전의 주역이 바뀌던 시대였기에 나가토가 제대로 싸워본건 1944년 레이테 만 해전이 최초였다. 

그나마 미군에게 공격을 받고 같이 출격했던 전함 무사시공고 등을 잃으면서도 

간신히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항구에 묶여있다가 그대로 마지막 남은 일본의 전함으로  종전을 맞게된다.

전후에는 미군에게 압수되었고  미군의 원폭 실험장 비키니 환초에 끌려가서 

수소폭탄의 피폭 실험후 태평양 바다밑으로 침몰된다.





1943년 미국 타임지 표지에 그려진 일본 군국주의 상징 일본 전함 나가토와 나가노 오사미




나가노 오사미(1880~1947)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원수였던 나가노 오사미는 

1880년 고치 현 사조쿠의 자식으로 태어나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해군 대위 시절  러일 전쟁에서 뤼순 공작부대 중포대 소속으로 일했으며

 뤼순항에 들어온 러시아 함대의 격멸에도 참가했다.

이때 나가노는 최전선에서 포격을 지시하여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에는 순양함 이쓰쿠시마의 포술장으로 근무했고, 1910년에 해군 소좌로 승진하였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주재무관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다시 미국 주재무관으로 가서 워싱턴 회의도 참관하였다.

나가노는 또한 해군병학교 시절, 자신이 체득한 달튼식 체벌 금지 조항 등을 만들어 교육 개혁안 개선에도 일조했는데

달튼식 교육은 그가 군령부차관으로 이직한 직후 소멸됐지만, 그가 가르친 해군병들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해군병학교장을 지낸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는 해군사관생도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체벌이 필요하다고 해 비판도 받았지만, 생도들 앞에서 대놓고

나가노의 비판을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는 다른 병사들과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4년, 나가노는 해군 대장에 취임한 후 군사 참모관이 되었고

1935년 12월부터 런던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참석해 연합국의 일방적인 전함감축안에 반대해 일본의 탈퇴를 통보하였다. 

나가노는 1936년 3월 9일, 일본 해군 대신으로 취임한 후 "국책의 기준"을 설정했는데

 이 때에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해군항공본부장에서 해군 차관으로 발탁하였다.

1937년 2월, 히로타 내각의 총사퇴로 해군 대신에서 물러나, 연합함대 사령관 겸 제1함대 사령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에는 다시 군사 참모관이 되어 1941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의 후임으로 군령부총장에 올랐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다시 군령부총장으로 복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진주만 계획을 승인하였다

1943년 6월 21일에는 원수로 추대되었고 1944년 2월 21일에는 

트럭 섬 공습의 여파로 다른 직책을 겸임하면서 군령부총장을 사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았으나

 수감 중이었던 1947년 1월 5일,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판결을 면제받았다

나가노는 일본제국 해군의 3요직 (해군 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 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photo from : content.ti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