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침몰한 루시타니아호 여객선 탐사 잠수부- Divers explore sunken passenger ship RMS Lusitania

슈트름게슈쯔 2015. 12. 10. 17:26





루시타니아호의 침몰 당시 모습 상상화  





루시타니아호는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남쪽 해안 킨세일에 있는 

올드 헤드 부근에서 몇 킬로미터를 앞둔 사이에 침몰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우현에 독일 해군 유보트 잠수함 U-20 에서 발사한 어뢰의

 공격을 받고 폭발하는 장면을 부근 해안에서 봄 산책 나온 사람들은

 배가 공포속에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독일 해군 유보트의 어뢰에 의해 폭발이 있은후 

18분만에 배는 1,198명의 승객,선원과 함께 침몰했다.

 761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사망자 중 128명이 미국인이였다.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은 특히 미국을 비롯해 세계를 충격 속에 빠트렸다. 

지금까지 어떠한 문명 세계 국가도 일반 승객을 태운

 비무장 선박을 침몰시킨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립노선을 걷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론이 높아졌으며,

결국 치머만 전보사건과 이 사건으로 미국내 반독정서가 높아졌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의 전투가 벌어질 때 미국 인구의 태반이 

서부전선 프랑스의 진흙탕 참호 속에서 싸우고 있는 나라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중립주의와 고립주의야말로 미국의 강력한 힘이었다.   

800만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이 독일과 싸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450만에 이르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도 아일랜드 공화국 운동이 극에 달하자 

아일랜드의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던 영국에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1915년 5월 초. 미국 주재 독일대사관은 대서양을 항해하는 영국선박에 

미국인이 승선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광고를 미국 신문들에 게재했다. 

워싱턴 D.C.의 독일 대사관에게 있어 해전 법규는 아주 명확했다. 

대영제국 또는 그 동맹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선박이 전쟁 해역-영국제도 인근 해역 포함-에

 진입할 경우 이유를 막론하고 공격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국 해군 본부는 즉시 루시타니아에 전문을 보내 지그재그로 항해하거나 

그밖에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항법으로 항해할 것을 명했다.

 루시타니아 승무원들은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후 1915년 5월 7일 쿠나르 정기선 루시타니아호는 

아일랜드 해안에서 독일 U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독일 해군 유보트 U-20 잠수함의 발터 슈비거 대위는 어뢰 발사를 명령했다. 

이 어뢰는 루시타니아호의 우현 한복판에서 폭발했으며, 

엔진실 보일러에서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거대한 배는 공격을 받은지 불과 18분만에 침몰했고 

승객과 승무원 1,959명 중 1,200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승객과 선원 1,957명 중 1,198명이 사망한 루시타니아호에 대한 무경고 격침은 

세계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교전국인 영국과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의 군수물자 수송 여부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였다.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128명이 희생된 미국dldjTek.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독일에 대한 무례한 외교와 강압’을 이유로 사임할 만큼 

강력했던 미국의 항의와 독일의 신속한 유감표명, 배상 약속으로 

루시타니아호 사건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때부터 1차 세계대전 참전론이 힘을 받았다. 

미국의 참전으로 이어진 루시타이아호 침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않다. 

독일 잠수함 유보트 U-20호가 5월 5일과 6일 이틀 동안 

인근 해역에서 영국 선박 3척을 격침시켜 경계령이 발령된 상황에서 

루시타니아호가 속도를 떨어뜨렸으며 호위를 위해 합류할 예정이었던 

영국 구축함 2척도 따라붙지 않았다. 

가장 큰 의혹은 2차 폭발이었다.

 독일 해군 유보트가 발사했던 어뢰는 분명 한 발인데 침몰 전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비밀리에 적재한 화물에 불이 붙은 탓이었다. 

화물칸에 실린 탄약 4,200상자와 1,250상자의 포탄은 

거대한 선체를 순식간에 삼킨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루시타니아호는 군용 수송선’이라는 독일의 주장이 맞았던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속속 나와도 

루시타니아호 침몰은 ‘비무장 여객선을 경고도 없이

 공격한 야만적 행위’라는 기억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승자는 거의 모든 것을 독식한다. 역사마저도.

  윌슨 대통령은 배의 격침에 분개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전쟁 요구를 묵살하고 

일련의 외교 각서를 통해 배상금 및 여객선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협상을 독일과 벌였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다.   

배의 침몰로 미국과 독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이 있은지 거의 2년이 지난 1917년 월이었다. 

이미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1917년 2월, 독일군이 미국 선박을 비롯한 모든 상선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잠수함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윌슨은 독일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결정적인 변화가 오게된 것은 독일 외무상인 짐머만의 전보 때문이었다. 

그 전보로 멕시코와 미국 간의 전쟁을 일으키려던 독일측 음모가 발간된 것이다.

  영국이 미국에 이 첩보를 넘겨주고 그해 3월 독일 잠수함들이 경고도 없이

 미국 선박들을 공격하자 격분한 미국인들은 전쟁을 요구했다.   

미국은 1917년 4월 6일 공식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미대통령인 윌슨은 참전 명분을 주기 위해 미 군함 서섹스호가 

영국해협에서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어 전 승무원이 사망했다고 허위발표를 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미국 국회 연설로 독일 정부와 즉시 외교 관계를 끊고 

미국의 참전 명분 획득하였다.

이 때 공식적으로 내건 참전 이유는 바다의 해방과 민주주의 수호였다.

1차세계대전 종전후 미국의 퍼싱(Pershing)장군은 공격받은 적도 

침몰한 적도 없이 건재한 서섹스호 사건은 거짓이라고 증언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 침몰한 수심 100m 아래에 있는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 


내부를 탐사하기 위해 무거운 잠수구을 착용한 탐사선 트리토니아호 선상의 영국 잠수부들 - 1935년 





침몰한지 20년후 처음으로 켈틱해 아일랜드 남서쪽 해안 309피트 깊이에 

가라 앉은 루시타니아 여객선으로 내려 가는 잠구부 - 1935년 






photo from : www.seattlepi.com

                    www.telegraph.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