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리비아 트리폴리 로마 유적 랩티스 마그나의 메두사 머리 - Roman ruins Medusa Heads of Leptis Magna in the Tripoli Libya

슈트름게슈쯔 2015. 12. 24. 22:27

 

 

 

 

 

 

 

 

 

 

 

 

 

 

 

 

 

 

리비아 트리폴리의 고대 로마 유적지 랩티스 마그나의 메두사 머리 조각상들

 

하나같이 모두 공통적으로 메두사 머리 대리석 조각상의 코가 훼손이 되어 있다.

 

리비아에서 고고학적인 장소만 보기 원한다면 렙티스 마그나가 선택된다.

 지중해 지역에서 최고의 로마제국 유적으로 여겨지는 렙티스 마그나는

 환상적인 건축물와 거대한 규모로 인해 유적에

관심이 없는 여행자라도 인상적인 느낌을 받게될 것이다.

 도시는 원래 피노시아인 항구로 기원전 천년부터 정착이 이루어진 곳이다.

노예, 금, 상아, 고가의 금속이 주변 역의 비옥한 농지에서 보충돼서 부를 창출했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은 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군단에 패한 이후 멸망하게된다.

그러나 이곳은 게르만족의 일파 반달족의 왕국으로 다른  455년까지 번영을 이룬다.

반달족은 전통적으로 실링기 반달족과 하스딩기 반달족 두 부류로 나눈다.

일찍부터 이들은 로마 제국과 접촉했으며 2세기에서 3세기 사이

로마 제국과 도나우 강 국경에서 몇번 충돌도 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하스딩기 반달족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고트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판노니아로 밀려와서 도나우 강 동안에서 살고 있었다. 

5세기 초, 아마도 훈족의 힘입에 밀린 반달족은 서진을 시작하여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달족은 당시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 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 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 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 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 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 이미 정착해 있던 로마 제국의 푀데라티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반달족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혔고 결국 알란족을 굴복시키고 정착하였다.

반달족의 족장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의 직위를 얻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 처럼

해적으로 변했고 북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429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조직하여

 약 8만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히포 레기우스 성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 이단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으나

결국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서 죽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은 435년, 로마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었으나

가이세리크는 곧 동맹을 깨고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후 35년동안 가이세리크의 반달 왕국은 대규모 함선을 조직하고

지중해 연안의 로마 제국의 영토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하였다.

 

로마 제국은 그동안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고 아틸라가 죽자

겨우 반달족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과

 가이세리크의 아들의 결혼으로 반달족을 무마하려했으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양측의 교섭을 깨졌고 455년, 반달족은 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이 때 교황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와 담판을 벌여

 로마 제국의 약탈을 최소화하는데 일조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반달족의 로마 제국 침공은 그 자체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어서

반달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사실상 대규모 학살과 파괴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반달족은 조직적으로 로마 제국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 아프리카로 옮겼다. 

462년까지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여러섬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게르만족 왕국과는 달리 그들은 피지배민족과

완전히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종교적, 인종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반달족은 카톨릭을 억압했다.

 

477년, 위대한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리크가 죽자

그의 아들 훈네리크가 왕위를 승계했는데 훈네리크는

 치세 말기에 카톨릭 교회와 마니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반달 왕국은 가이세리크가 죽으면서부터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동고트족에게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훈네리크의 아들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카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친-로마 제국 정책을 펴서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533년, 겔리메르가 힐데리크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반달 왕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벨리사리우스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왔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결국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534년에는 반달 왕국의 두번째 도시인 히포 레기우스마저 정복했다.

겔리메르는 결국 비잔티움 제국군에게 항복했고 반달 왕국은 무너졌다.

로마 제국은 다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카톨릭 교회를 부활시켰다.

로마제국이 533년에 다시 세력을 확대해 보수를 실시하나

 현지 종족은 로마를 배반하고 베르베르에 의해 지배되는 목축용의 유목생활로 복귀한다.

 644년의 아랍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의 군단과 생활방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11세기에 들어 렙티스 마그나는 결국 모래 언덕에 맡겨진다.

 20세기에 들어 유적 발굴이 시작됐으며 매우 양호하게 유적이 보존된 채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유적 입구의 옆에 커다란 박물관이 있지만 볼만한 유적은 유적지 자체에 남아있다.

가장 먼저 확인해 볼 것은 세버란 아치(Severan Arch)로

기원전 230년 자신의 고향을 방문한 셉티무스 세버루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건설됐다.

 멀지 않은 곳은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장식된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큰 하드리아닉 목욕탕(Hardrianic Baths)이 있다.

계속해서 유적을 돌아보면 님프를 숭배하기 위해 만든

님페움(Nymphaeum)을 부분적으로 건너게 되며,

 로마의 포룸과 디자인이나 웅장함에서 비슷한 두 개의 거대한 포룸(Forum),

 비범하게 정교한 바실리카(basilica)와 극장(theatre)을 발견할 수 있다.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700m를 가면 지역주민의 즐거움을 위해

2륜 전차 경기가 열리던 원형경기장이 나온다.

 

 

 

 

 


 

 

photo from : www.geschiedenisbeleven.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