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장검의 밤 - 나치 독일의 대숙청-- Nazi German Great Purge

슈트름게슈쯔 2016. 2. 18. 10:45

 

 

 

 

아돌프 히틀러와 에른스트 룀(Ernst Röhm) - 1933년 8월

 

 

 

 

 

독일 SA 돌격대 참모장 - 에른스트 룀(Ernst Röhm : 1987~1934)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이란 직역하면 긴 칼의 밤이다.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은 1934년 6월 30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 SA 참모장 에른스트 룀(Ernst Röhm)과 

반(反) 히틀러 세력을 숙청시켰던 사건을 말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직 수상이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저택에서 

총에 맞아 암살당했으며 반(反) 나치파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와 

룀의 부관이었던 에드문트 하이네스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내에서 권력 싸움에 밀렸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및 과거 뮌헨 폭동을 진압했던 바이에른 주지사 

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 등도 차례대로 암살당했다.  

한편 테오도어 아이케는 에른스트 룀을 체포한 뒤 룀에게 자살을 하도록 

권총을 건넸지만 룀은 자살을 거부했다.

 결국 에른스트 룀은 감옥에서 테오도어 아이케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만다.

 

 

 

 

 

테오도어 아이케(Theodor eicke :1892 ~ 1943)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거사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돌격대 및 국방군 내 반항 세력, 

그 밖의 반 나치 세력과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 한 사람들을 

1934년 6월 30일 ~ 7월 2일에 걸쳐 숙청시켰다.

이 사건은  히틀러 뿐 아니라 슈츠슈타펠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장검의 밤  숙청은 매우 복잡한 이유로 벌어졌다.

당시엔 몰랐지만 장검의 밤ㄴ히틀러가 절대 권력을 얻게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제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자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을 해산시켰다.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살아있을 떼는

 형식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유지되고 있었고, 

실상이야 어찌되었든 제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헌법과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서 히틀러와 맞설 수 있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히틀러라도 아직까지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국방군은 아직까지도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권력 기반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돌격대가 집권까지의 공적을 내세우며 

마음대로 날뛰는 것은 가장 부담되는 일이였다.  

1933년 여러 보수 자본가 세력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집권하고,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다.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 데 없어진 사냥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에른스트 룀의 사상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룀은 반동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조차 바꿀 순 없었다. 

상당수가 노동계급 출신인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이들을 비유하자면 

겉보기에는 나치당 제복의 색상처럼 갈색이었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들처럼 붉었다.

 집권한 히틀러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 보답하지 않자 이들은 곧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귀족들이 주름잡는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혁명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배기 인민군을 창설하려 했다.

당시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 상급 집단(군단에 해당)과 

18개의 돌격대 집단(사단에 해당)으로 구성되어 독일정규군의 5배에 달하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룀의 이러한 의중은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독일 국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이들도 역시 거리에서 쌈박질이나 하며

 수뇌부라는 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 오합지졸들로 구성된 집단 따위에게 

독일 국군을 들어다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 역시도 융커들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군부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군부에 필요성을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  

또, 돌격대에서 히틀러 개인숭배 대신 룀 개인숭배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나치당과 히틀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룀과 돌격대가 군권까지 장악한다면 군대가 국가의 위에 있던 

에른스트 룀이 히틀러를 꼭두각시로 만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헤르만 괴링- 1934년 5월 1일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를 매우 주저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 내에서 룀을 반대해 오던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히믈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은 에른스트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히믈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하였다. 

히믈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대(SD) 사령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에게 2000만 마르크를 받아 6월 24일 SA를 동원하여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이를 받아든 히틀러는 결국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히믈러, 하이드리히 등은 이 동안 계속 살생부를 작성하였고, SS에 동원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를 위해 6월 30일까지 

모든 SA지휘관을 뭔헨의 바트비제 온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히믈러 휘하의 SS를 동원하여

에른스트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요제프 디트리히는 친위대 2개 중대를 이끌고 뮌헨에 도착했고 뒤이어 히틀러도 합류했다.

 직후 히틀러는 마중나온 뮌헨 돌격대 지휘관 2명을 6월 29일 

뮌헨에서 수천 명의 돌격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돌격대를 버렸다고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히틀러는 그 두 명의 계급장을 떼어버리더니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며 말했고 

그 두 명은 영문도 모른채 체포된 후 다음날 총살당했다. 

그 뒤에 직접 친위대 및 경찰 병력을 대동하고 바트비제 온천 인근 돌격대가 투숙하고 있던 호텔을 급습했다.

그때까지 자고 있었던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를 

전원 체포했고 이들을 뮌헨의 교도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정오경, 히틀러는 뮌헨의 나치당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에른스트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고 

에른스트 룀과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이 선포로 인해 돌격대 지휘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리고 룀이 쿠데타를 하려했다는 선포와 함께 베를린에서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들이 숙청 작업을 개시하여, 

나치 돌격대와 함께 독일 내에 반나치 세력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헤르만 괴링이 주도한 이 숙청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뭔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SA 돌격대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도전하던 보수파 인사들, 

그리고 히틀러의 정적들이 모두 숙청 대상이었으며 

이 정적들에게는 룀의 쿠데타 기도에 가세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래도 룀 같은 경우는 옛 동료의 정을 봐주는 것 마냥 자살할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룀은 자살을 거부했고, 자신이 처형되어야 한다면 

히틀러 더러 직접 하라며 앞 가슴을 내놓고 서 있었다. 

결국 룀은 친위대 장교이자 다카우 강제수용소 소장인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사살당했다.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반란음모 혐의가 씌워졌지만, 

이는 처형 며칠 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 부른다. 

 에른스트 룀 돌격대를 이용해서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고 그에 따른 보답을 받기도 했으나, 

국방장관이 되려는 지나친 행동과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집단들을 적으로 돌리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숙청 대상자 1순위에 놓여 숙청당했다.

 군 출신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였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는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지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주요 보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히틀러를 견제했고, 

그는 아직도 군 내부에 어느정도의 지지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여러 보수 세력과 위협을 가해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6월 30일 신혼집에서 습격받아 결혼한지 

고작 2년 밖에 되지 않았었지만 총살 당했다.

그의 아내도 함께 총살했다. 

 정치꾼이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국방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숙청을 반기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 1904 ~ 1942)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당 초기부터 활동했으며 당 내 좌파를 대변했다. 

그는 당권과 노선을 놓고 히틀러와 대립하다 힘을 잃었고, 

결국 이른바 슈트라서 사태로 인해서 나치당이 거의 파멸될 뻔한 일을 제공했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그도 희생되었다. 

여담으로 슈트라서가 폭행당하고 고문당하고 총살당했을 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와서 "그 돼지가 아직도 안 죽었나? 

그 돼지가 죽도록 가만히 놔둬." 라며 

슈트라서는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프란츠 폰 파펜 그나마 프란츠 폰 파펜은 슐라이허나 자기 비서들처럼 부부 동반으로 살해 당하지는 않았다.

 파펜은 전직 총리이자 히틀러 집권에 기여한 업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히틀러가 함부로 제거하기는 조금 버거웠다. 

게다가 마르부르크 연설로 서방 국가의 주목까지 받고 있었기에 

섣불리 파펜을 제거했다간 외교 문제로도 번질 수가 있었다. 

장검의 밤 당일 파펜이 찾아가서 항의하려 했던 바로 그 괴링이 파펜을 보호했다고 한다.

 장검의 밤 5주 후에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사망한걸 보면 그는 운이 남아 있었던 셈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경고한다는 목적으로 그의 측근들을 쏴 죽이고, 몇몇은 개울에 던져버렸다. 

이후 그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 당하고 가택연금. 그리고 전쟁기간 내내 터키 대사로 사실상 쫒겨난다.  

뮌헨 폭동 당시 바이에른 주지사였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는 

맥주홀 쿠데타 당시의 일을 잊지 않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처형되었다. 

프란츠 폰 파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에드가르 융(Edgar Jung)은 

문제의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의 원고를 쓴 사람이었다. 

역시 그도 돌격대와 아무 관계 없음에도 파펜을 못 죽이니

 꿩 대신 닭격으로 파펜에게 경고 한다는 목적으로 죽여버렸다. 

프란츠 폰 파펜의 공보비서.헤르베르트 폰 보세(Herbert von Bose)

 역시 꿩 대신 닭이라고 파펜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그의 공보비서였던 보세를 죽였다. 

빌헬름 슈미트(Willi Schmid)는 평범한 음악 평론가였는데, 

루드비히 슈미트를 제거하려다가 실수로 그를 죽였다.

 루드비히 슈미트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있던 오토 슈트라서의 측근인데 

해외로 망명해 있던 오토 슈트라서 대신에 그 측근을 제거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오류가 생겨서 엉뚱하게도 빌헬름 슈미트가 살해된 것이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슈미트의 유가족에게 개인적인 배상을 지불하였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이 숫자가 약 500명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뭔헨 맥주홀 쿠데타 당시에 도와주지 않고 내뺐던 사람들 

그리고 옛날에 돌격대에게 두들겨 맞은 후 히틀러를 고소해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만들었던 사람도 죽였는데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난자질을 가해서 살해했다.

 

 

 

 

 

 

photo from : tumbl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