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얼라이브[Alive 1993]

슈트름게슈쯔 2012. 1. 30. 15:15

 

 

 

 
얼라이브(Alive: The Mircale of the Andes)
 
미국/ 121분 개봉 : 1993.4.24
 
감독: 프랭크 마샬
 

출연 : 에단 호크(난도 파라도), 빈센트 스파노(안토니오 발디),조쉬 해밀톤(로버토 카네사)...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오후, 최대의 참사가 일어난다.

우루과이대학 럭비팀을 태운 항공기가 칠레로 상륙하기 직전 안데스산맥에서 추락게 되는 것이다.

시야는 흐렸고, 조종사는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높은 산맥들은 날개를 날려보내고 프로펠러는 객실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게 되고

마침내 꼬리부분은 떨어져 나가게 된다.

결국 비행기는 동체만 남아 미끄러져 예상치 못한 곳에 안식처를 잡게된다.

(해발 3천 5백m, 흰눈의 천국인 안데스 산맥에서)

  승객 몇은 그자리에서 죽고, 살아도 중상이기에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중 난도 파라도(Nando Parrado: 에단 호크 분),

안토니오 발비(Antonio Balbi: 빈센트 스파노 분),

로베르토 카네사(Roberto Canessa: 조쉬 해밀톤 분)는

남은 생존을 돌보며 구조대를 기다린다.

그러나 구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8일이 지난다.

그러자 남은 라디오 안테나를 최대한 이용하여 방송을 듣게 되나

소식은 수색작업을 포기했다는 절망적인 보도였는데.

  절망의 늪이 계속된지 10주, 40도나 되는 흑한!. 그뒤 이들이 어떻게 생존하였나는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살아야겠다는 생존에 대한 인간의 본연에서

용감한 "난도와 로베르트"는 죽음의 경지를 또 한번 넘으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마침내 칠레의 푸른 땅이 숨쉬는 계곡을 만나게 된다.

 72일간의 생존일지를 덮게 되는 날이었다.

1972년 12월 23일, 안데스 산맥의 기적이 마침내 탄생한다.

  [안데스에서 죽은 29명과 살아남은 16명의 승객에게 이 영화를 헌정합니다]

 

 

 

 

 

 

 

 

 

 

 

 

 

아...! 난 살아있다

 

영화는 갑작스런 비행기 추락으로 시작된다.

안데스에 떨어진 비행기 속엔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색팀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했고 버려졌다.

그들에게 남은 건 초콜릿 몇조각과 와인. 널부러진 시체들 뿐이었다.

밤엔 영하 30~40도의 추위와 싸우기 위해 여럿이서 체온을 나눴고

몇겹인지도 모르는 침낭을 덮었다. 그러고도 동상은 찾아온다.

 

 

 

안데스의 어느 곳.

문명과의 단절에서 그들은 극한 상황을 겪는다.

죽어가는 친구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기도 뿐이다.

허나 신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상처가 썩어서 죽고, 갑작스런 눈사태에 죽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친구의죽음을 옆에서 지켜만 봐야하는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아팠을까?

 

 

 

 

 

결국 수색대가 조난자수색을 그만둔다는 라디오를 듣고 이들은 위기에 직면한다.

식량은 바닥났고 이제 굶어 죽게 생겼다.

그리고 선택을 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먹기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을 먹어야만 한다.

우리는. 나와 당신은 그럴 수 있겠는가?

'내가 시체를 먹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 마라.

우리는 아직 죽음의 문턱에 선 우리의 모습을 알지 못하니까.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던 어느 날

갑작스런 눈보라로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 중 8명이 죽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저 이 눈보라가 사라질 때까지

부서진 비행기 속에 바람을 피해 있는 것 뿐.

한 순간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은 서서히 주황색 빛에 달아나고 있었다.

폭풍우가 그치고 해가 떴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하늘에 떠있는 동그랗고 따뜻하고 무한한 생명으로 가득찬 별을 보고 말한다

'저기에 신이 있다' 고...

그리고 카메라는 이 웅대함을 보란듯이 멀리서 그들을 촬영한다.

 

드디어 뜬 태양아래서

장엄한 'Andes' 산맥에서

그렇게도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게 '난 아직 살아있다'고 외치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겨울이 가고 밤이 짧아질 때까지 기다려 안데스를 넘기로 한다.

친구의 고기를 먹은지 70일. 3명의 남자는 조난자들을 대표해 안데스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들은 힘들었다. 식량은 떨어져가고, 바람을 막아주는 비행기가 없는 밤은 춥고 길었다.

그러다 100km는 떨어졌을까? 드디어 눈이 보이지 않는 산이 보였다.

저기만 다다르면 드디어 꿈에 그리던 초록색 나무와 강과 풀과

그런 생명이 숨쉬는 것들이 우릴 기다리리라.

허나, 너무나도 멀리 보이는 저 산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고 한 남자가 말했다.

불가능하다고.

그러자 또 다른 한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70일동안 살아남은 것. 그것이 불가능이다'

(감독이 감동적이게 하려고 일부러 ... 넣은 티가 나긴한다)

 

결국 그들은 안데스를 넘어 강이 흐르는 숲에 다다른다.

그건 72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불러 살아남은 14명의 승객을 구해낸다.

 

 

 

 

 

 

 

 

 '늑대와 춤을'을 보고서는 자연의 장엄함을

너무나 잘 표현한 영화라고 감탄할수 있다.

그리고 'alive'를 보고 나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 두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모든 생명에, 모든 자연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우주의 신비함이 숨어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작품 기교독교를 두각시키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 아니냐 하며

비판을 했다가 몇년째 욕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누구나가 죽음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눈 앞에 있다면

오! 하나님이 아니라 부처님, 공자님, 알라신.... 죄다 찾을 것이라 본다.

일단 이 영화 한번 보면 실화라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크게 느껴지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얼라이브는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 조난사고를 바탕으로 제작된 실화 영화 이다.

안데스산맥 속에 조난당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72일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큰 감사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실제 이야기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많이 잊혀져 있다.

2006년에 책이, 그리고 2007년에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오면서 다시금 이 사건에 눈을 돌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에 개봉된 영화 '얼라이브'를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껴볼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얼라이브의 소재가 된 이야기의 내막이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마침 일본 위키백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낄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행

 

 

 

 사고기 페어차일드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루과이 곤군의 쌍발 터보 프로펠러기인 페어차일드 FH-227D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스텔라 마리스 컬리지의 럭비 선수단을 싣고

 우루과이에서 칠레의 산티아고를 햔해 안데스 산맥을 통과하는 항로를 날고 있었다.

페어차일드 기는 칼라스코 국제공항에서 출발했지만,

출발 전날인 10월 12일부터 산맥상공의 날씨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멘도사 부근에 착지해 있었다.

 

 

 

 

 

멘도사에서 찍은 사진

 

10월 13일에 비행을 재개한 후, 571편은 산맥 상공을 통과하는 항로로 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기장은 산티아고에서 쿠리코를 통과하는 항로로 가는 것을 칠레 항공관제관에게 통지했지만,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

페어차일드 기의 상한고도는 9000m였는데,

이것으로는 기체가 직접 멘도사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서 산티아고로 가는데 큰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기장은 안데스 산맥을 따라 비행했고, 산맥의 서쪽에서 산을 우회하는 항로로 변경 후,

산을 횡단해서 쿠리코를 통과하는 것으로 보고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기수를 북으로 돌렸고,

쿠리코 남쪽에 있는 안데스 산맥의 칠레국경으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게 되었었다.

 

당시 항로는 구름에 덮여버렸으므로, 기장은 항로를 통과하는데 항공관제에 의지할수밖에 없었다.

증폭된 바람이 기체의 속도를 감속시키는 것을 생각치 못하고

항공관제를 따라 한 결과, 항로변경이 너무 빠르게 개시되었다.

결국 기체는 산 중턱에 격돌하게 되었다.

 

 

 

추락

 

 

 

 

 

당시 추락지점

 

 

 

산들을 깊이 덮은 구름 속에 돌입, 페어차일드 기는

 곧이어 무명의 봉우리(나중에 세레로 봉 이라고 알려졌음)에 추락했다.

추락지점은 소스네아도 봉과 팅기리리카 화산 사이였다.

그곳은 리모트 산으로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었다.

그 지점은 고도 4200m로, 기체는 우익과 수직꼬리날개가 잘려나가고, 동체에는 구멍이 뚫렸다.

 잘려진 좌익은 동체에 구멍을 뚫었고, 기체는 최종적으로 눈에 묻혀 정지하기까지 험한 산을 활주했다.

또, 기체의 후미는 잘려 많은 짐을 싣고 있는 채로 동체와 분리되어 다른 곳에 떨어졌다.

 

 

 

승객 승무원 45명중 3명의 승객과 2명의 승무원이 비행기 밖으로 튕겨 나갔고,

9명은 추락시 즉사했으며 이날 안에 부상으로 3명이 사망했다

(사망 12명, 행방불명 5명, 생존 28명).

추락 8일후 부상으로 1명이 사망했다(사망 13명, 행방불명 5명, 생존 27명).

 

남은 27명은 얼어붙을것 같은 추운 고산에

어떻게 생존을 가능하게 할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추락직후 좌석에서 튕겨져 다리에 골절을 입었고,

생존자를 위한 방한복이나 방한화 등의 장비가 부족했다.

설맹(눈 빛에 의해 눈이 머는 것 - 최후의 생존자인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는

조종실의 선 바이저를 이용해서 선글래스를 만들었다.)을 막는 선글라스도 없었다.

어떤 종류의 의료품도 없었고,

생존자 중에 있던 2명의 의대생은 추락한 항공기 지주를 이용해서 부목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루과이, 칠레, 아르헨티나 3개국에서 나온 탐색대는 탐색을 개시했지만,

페어차일드기의 외장은 흰색이었기 때문에 쌓인 눈과 섞여 하늘에서는 발견하기 너무 어려웠다.

탐색은 개시후 8일째에 중지되었다.

 

기체의 생존자는 기내에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탐색상황을 들었다.

로이 할레이는 추락 11일후에 탐색이 중지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피어스 폴 리드는 저서'Alive: The Story of the Andes Survivors'에서 이렇게 적었다.


 

"뉴스를 듣고 로이 주변에 있던 생존자들은 파라도를 빼고 전원 울며

기도를 시작했다(파라도는 냉정하게 서쪽에 있는 산을 바라다보았다).

구스타보 코코 니콜리히는 기체에서 나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듣고 있는가를 알았다.

니콜리히는 어두운 동체 입구의 수트케이스와 셔츠를 들고 기체 위에 올라가 흔들면서 '이봐!'하고 외쳤다.

'낭보야! 라디오를 들었어, 탐색대가 찾고 있대'.

기체 안에서는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눈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 모두를 덮었을 때, 그들은 돌아왔다.

파에즈는 화내며, '대체 그게 어떻게 낭보냐?'라고 소리쳤다.

 

'이 의미는,'하고 니콜리히는 말했다.

'우리들은 스스로 탈출해야 한다는 거네'.

이 한 소년 용기로 가득차던 절망은 정지되었다."

 

 


식량

 

 

 

 

사고현장에서

 

 

생존자들은 소량의 식료를 가지고 있었다(몇개의 초콜릿과 그 외 과자와 와인).

추락후 수일간 그들은 이 식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소량을 분배했다.

또, 피토는 좌석의 금속을 이용해서 그것을 눈 위에 두고

태양열로 눈을 녹여 빈 와인 병에 물을 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렇게 적게 지급했어도, 비축식량은 곧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어떤 식물이나 동물도 눈으로 덮여있는 산 위에서는 생존할수 없었다.

그 결과, 생존자들은 생존의 방법으로서 사망한 동료의 몸을 먹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 결정으로 인육을 먹게 될 경우, 그 고기는 대부분이 그들의 친구들의 몸이었던 것으로서,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2006년에 출판된, 생존자 난도 파라도의 저서인

'Miracle in the Andes:

72 Days on the Mountain and My Long Trek Home'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고산에서 몸에 필요한 칼로리의 양은 천문학적이었다.

새로운 식료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은 없었고, 우리들은 정말로 배가 고팠다.

우리들은 새로운 식료를 찾아 기내를 탐색했다.

몇번이나 동체 안을 찾았으며, 모젤로 산을 올랐다.

우리들은 그런데 사용하고 있는 화학물질이 신체에 득보다 많은 해를 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하물 끝에 붙어 있는 가죽을 먹으려고도 했다.

우리들은 몇번이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들이 입고 있는 옷을 먹을수는 없고, 알루미늄, 플라스틱, 얼음, 임석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승객의 대부분은 카톨릭교였고, 이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피에스 폴 리드는 말했다.

문제의 행위는 성찬과 동일시된다고. 그 외의 사람들(역자 주 - 대부분 언론)은,

 처음 이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는 축복했으나,

이 행위가 발각된 후에 태도를 돌변했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눈사태

 

10월 29일 아침에 눈사태가 발생했다.

눈사태는 자고 있는 동안 동체 안까지 도달했고,

전원은 눈 속에 매몰되어

자력으로 탈출한 19명의 생존자를 남기고 8명이 질식으로 사망했다(사망 26명, 생존 19명).

3일후, 기체는 몇 피트의 눈 아래 묻혔고, 생존자들은 아주 좁은곳에 갇혀서 연명하고 있었다.

 

눈사태 후,

그들 중의 몇 명은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

산 정상을 넘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집요하게 말했다.

 

 

기체는 쿠리코를 통과했다고 하는 부기장의 말에 의지해 일행은

칠레가 서쪽 수 마일 지점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몇 명 중에서 가장 건강한 생존자가 제안에 기준해 출발했고,

전원은 기체에서 떨어진 꼬리 부분의 발견을 바랬었지만,

 그들은 그대로 조난당했다

(6명의 유체는 꼬리 부분의 추락지점보다 높은 산 정상에서 발견).

또, 강한 추위속에 고산에서 철야를 해야 한다고 하는 등,

 어려움이 예상되는 원정을 계속하지 못했다.

 

몇번인가 원정을 도전한 끝에, 난도 파라도, 로베르토 카넷사 및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을 포함한 최종그룹이 결성되었다.

 

 

11월 17일,

로베르토 카넷사의 주장으로 처음엔

낙하한 꼬리 부분을 발견하기 위해 산맥의 동쪽으로 가는 것을 시도했다.

이 원정때 그들은 몇개의 수트 케이스를 포함해 기체의 꼬리 부분을 발견했다.

 또, 잔반, 만화잡지, 의복 및 담배를 발견했다.

또, 안토니오는 파이프에 말려 있는 절연재(후에 그들이 탈출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를 발견했다.

 

 

 

무전기

 

당초, 추락직후 구원 요청을 위해 콕핏 라디오(무전기)를 사용하는 것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무전기에는 출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항공기관사(추락 직후엔 생존했지만 그 후 사망)는

추락후에 떨어진 기체의 꼬리부분에 배터리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최종적으로 꼬리 부분을 발견했으므로 배터리도 발견했지만,

이것은 기체에 가지고 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으므로

11월 19일, 대신 무전기를 꼬리 부분으로 운송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들이 원정에서 귀환하고, 꼬리부분으로 동행한 로이 할레이는 의욕은 없었지만 수리를 도왔는데,

보다 젊은 생존자 한 사람과 전기공학의 전문가가

11월 25일부터 11월 29일까지 몇일간 수리를 계속한 끝에

무전기는 수리불가능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그들은 기체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 때 알수 없었겠지만,

이 무전기는 배터리로 구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체의 엔진이 발생시키는 전력으로 동작하는 것이었다.

 

 

 

침낭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몇일간 강한 추위 속에서

밤을 지낼 방법이 없으면 긴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다.

여기서, 침낭을 제작하는 것이 제안되었다.

 2006년 출판된 생존자 난도 파라도의

'Miracle in the Andes: 72 Days on the Mountain and My Long Trek Home'에는

 이 때의 침낭에 대해 34년후 기술했다.

 

 "2번째의 도전은 일몰후 바깥에 노출된 내 몸을 덮는 것이었다.

밤은 아직 우리들을 죽이는게 가능할 정도로 추웠고(역자 주 - 이 시기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

한낮의 기온이라도 넓게 노출된 슬로프에서는 피난할수 없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냉동되지 않고 긴 밤을 보내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꼬리 부분에서 잘라낸 단열재가 말려 있던 폴(pole)을 발견했고,

해결책을 얻었다.

원정에 대해서 모두 의논을 했고, 침낭을 만들기 위해 바지를 꼬매는 것이 가능한가 연구했다.

우리들은 3명의 원정대가 원정에 견딜수 있도록 침낭을 만들었다.

3명의 체온이 절연포에 의해 보온되는 상태라면,

가장 추운 밤이라도 지새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칼리토스 파에즈는 작업에 도전하면서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소년이었을 때 재봉을 가르쳤다고.

그의 어머니의 화장함에서 재봉도구인 침과 실을 발견했고,

그는 작업을 이루어낼수 있었다.

칼리토스는 다른 생존자들에게도 재봉을 가르쳐주어 우리들은 교대로 작업을 했다.

코체, 구스타보, 피토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작업이 빠르다고 판명되었다."

 

 

침낭 완성후, 다른 생존자 알프레도 판초 델가도의 친구인 누마 투카티가

부상으로 인해 죽자, 카넷사는 출발을 망설이는 이들을 설득하였고,

 최종적으로 3명의 원정대는 12월 12일에 원정을 개시했다.

 

 

 

1972년 12월 12일

 

 

 

카네사와 파라도가 세르지오 카탈란과 만나고 찍은 사진


 

추락후 2개월. 파라도, 카넷사, 비신틴은 등산을 개시했다.

파라도는 선두에 서고, 행진속도를 맞추기 위해 빈번하게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력에 거스르는 등정의 행보와 저산소농도의 여행은 어려웠다.

또, 강한 추위가 있었지만, 침낭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들은 몇 밤을 살아남을수 있었다.

 

여행 2일째(12월14일)에 파라도는 산 정상에 올랐다.

그는 그 광경에 숨을 삼켰다.

그의 앞에 보여지는 넓은 광경은, 보다 많은 산들이었다.

산맥은 눈 앞에 작은 Y모양과 같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고,

당초 계획과 같이 산맥을 넘어 원조를 구하는 희망은 끊어졌다.

파라도 및 카넷사는 원정을 계속했지만,

비신틴은 식료의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스스로의 식료를 두명에게 주고 추락지점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루트는 내려가는 것 뿐이었고,

기체의 깨진 부분으로 만든 신발이 있어서 돌아가는데는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파라도와 카넷사는 원정 개시 부터 7일 이상, 9일째(12월 20일)의 한낮에

휴식을 취할때 이외에는 걷기를 계속했다.

 

12월20일 밤,

잠을 자려고 했던 두 사람 중 카넷사가 불을 일으키려고 장작을 모았을때,

카넷사는 강 건너편에 말에 탄 남성과 같은 것을 보았고,

파라도를 큰 소리로 부르며 사면을 달려내려가 말했다.

파라도는 카넷사가 말 위에 남성이 있는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말 뒤에는 3명의 남성이 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강으로 달려온 파라도와 카넷사는 강 건너편 칠레의 우아소에 있는

세르지오 카탈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내일'이라고 외쳤다.

 

 

 

구조

 

12월 21일, 남자는 돌아와서 그들에게 연필과 종이를 연결한 돌을 던졌다.

파라도는 추락사고에 관한 주의를 적고, 그것을 되돌려 던졌다.

카탈란은 구조를 위해 몇시간 말을 탔고, 최종적으로 헬리콥터의 구조대가 나타났다.

파라도는 추락지점의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한 헬기 안내역이 되었다.

또, 생존자가 10월13일 우루과이 571편 추락사고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는

뉴스는 세계의 보도기관의 주목을 받았고, 홍수와 같이 리포터들이 나타났다.

 

 

 

 

구조를 위해 떠나는 헬기

 

그 후 12월 21일, 추락지점의 생존자들은 라디오에서 파라도와 카넷사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2월 22일 오후에 파라도를 태운 구조헬기, 2명의 탐색대, 고산구출전문가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출되었을때, 생존자의 수는 14명으로 줄어 있었다.

두번째 헬기가 도착할때까지, 추락지점에 생존자 8명을 남긴채 헬기는 출발했다.

 두번째 헬기는 12월 23일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에서 16명의 생존자 전원이 구출되었고,

생존자 전원이 산티아고의 병원에 수용되어

고산병, 탈수증상, 동상, 골절, 괴혈병, 영양실조의 치료를 받았다.

 

최초의 구출 후, 그들은 그들의 가족과만 후일 상세한 비밀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했고,

 공식적으로 생존자들은 기내에 있었던 몇개의 치즈를 먹고 연명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내에서 잘라 보존되던채로 남아 있었던 유체의 사진

12월 26일에 산티아고의 신문 'El mercurio'기 1면 톱에 나오게 되었다.

 생존자들의 인육식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기사가 발표된 것이다.

 

생존자들은 12월 28일에 스텔라 마리스 대학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72일간의 생존에 대해 자세하게 말했다

(세월을 지나, 이 일에 관한 책 2개, 영화 2편, 및 공식 사이트가 사실의 공표에 더해졌다).

 

구조대원은 후에 추락지점에 돌아와 추락지점에서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쌓여 있던

 돌 산 및에 죽은 사람들의 유체를 묻었다.

묘비로 철제 십자가를 돌 산 위 중심에 세웠다.

이 외의 동체내부에 남아있었던 잔해는

쓸데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드는 인간들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소각처분했다.

 

 

 

 

현재의 무덤



생존자(사고당시 연령)

호세 페드로 알골타 21세
로베르토 카넷사 19세
알프레도 판쵸 델가도 24세
다니엘 페르난데즈 26세
로베르토 보비 프랑소이스 20세
로이 할레이 20세
호세 루이스 코체 인시알테 24세
알바로 만지노 19세
하비에르 메톨 36세
카를로스 칼리토스 파에스 18세
난도 파라도 22세
라몬 몬쵸 사벨라 21세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 24세
에도와르도 스트라우치 25세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 19세
구스타보 세르비오 19세

 

 

 

 

생존자들

 

사망자(25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이 사망)

프란시스코 판치토 아발 21세
가스톤 코스테마제 23세
라파엘 에챠발렌 22세
호세 귀도 마그리 23세
알렉시스 알레호 오우니에 20세
필리페 마기리아인 22세
훌리오 마르티네즈 라마스 24세
다니엘 마스폰즈 20세
후안 카를로스 메넨데즈 22세
구스타보 코코 니콜리히 20세
아르투로 노게이라 21세
수산나 사시 파라도 20세
마르셀로 페레즈 25세(주장)
엔리케 플라테로 22세
다니엘 쇼 24세
디에고 스톰 20세
누마 투카티 24세
카를로스 발레타 18세
페르난도 바스케즈 20세
릴리아나 메톨 부인 34세
프란시스코 니콜라 박사 40세
에스테르 니콜라 부인 40세
그라시엘라 마리아니 부인 43세
에우헤니아 파라도 부인 50세
훌리오 세살 펠라다스 대령 39세(기장)
단테 라구라라 중령 41세(부기장)
라몬 마르티네즈 중위 30세(항법사)
오비디오 라미레스 병장 26세(스튜어드)
카를로스 로케 병장 24세(정비사)

 

 

관련작품

 

이 사건을 소재로 처음 출판된 책은 Alive: The Story of the Andes Survivors로,

구조 2년후에 출판되었다.

생존자와 그 가족의 인터뷰를 토대로 피에스 폴 리드가 썼다.

이것은 높은 성공을 거두고 지명도 높은 논픽션이 되었다.

서두에 생존자들이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바랬던 이유가 쓰여 있다.

 

"우리들은, 이 책이 출판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많은 소문이 유포되고 있고, 진실은 산맥 속에서 일어났다.

우리들은 죽은 친구들과, 우리들이 필요로 했을때 사랑을 담아 우리들을 받아주신

우리들의 양친의 이해에 우리들의 괴로움과 연대감이 쓰여 있는 이 책을 바친다."

 

 

증판은 2005년 로이 하퍼에 의해 발행되었다.

그 때의 타이틀은

 'Alive: Sixteen Men, Seventy-two Days, and Insurmountable Odds' 로 바뀌었다.

 또, 전판의 서문은 피에스 폴 리드와 생환한 생존자인

코체 인시아테, 알바로 만지노의 인터뷰로 바뀌었다.
 

구조 34년 후, 난도 파라도의

'Miracle in the Andes: 72 Days on the Mountain and My Long Trek Home'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파라도가 실제로 체험한 체험담이 쓰여 있다.

 

 

 

 

 

"사실상, 우리들의 생환은 국가의 프라이드의 문제였다.

우리들의 시련은 밝은 모험담으로 축하받았다.

나는 그 산맥에는 영광따위 없었다고 그들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 산맥에 있던 것은 모든 추악함과 공포와 자포자기와

너무도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가는 것을 본 불쾌함이었다.

 또, 나는 언론이 우리들이 생존하기 위해 먹었던 것에 대해 선동을 하자 동요했었다.

 

우리들의 구출후 바로 카톨릭 교회의 직원들은 교의에 비추어도

우리들이 죽은 자의 살을 먹은 것은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로베르토가 산에서 논쟁을 했듯이,

 교회는 '죄는 자신들이 죽음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있다'고 세계에 발표했다.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만족이었던 일은,

죽은 소년의 양친의 대부분이 우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위를 이해했고,

받아들인 것을 세계에 공표해 지지를 표명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제스쳐들에도 관계없이,

많은 보도가 생각없이 강인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식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에는 혐오스러운 사진을 한켠에 장식하고, 무섭게 연출해서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Stranded: I Have Come from a Plane That Crashed on the Mountains는,

곤잘로 알리혼의 제작에 의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생존자와 그들의 가족과 구조에 관계된 몇명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또, 생존자가 추락지점에 돌아오는 원정이 기록되어 있다.

 영화는 2007년에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 상을 수상했다.

 

Alive: The Miracle of the Andes는 찬반양론의 비평을 받았다.

 

감독 프랭크 마샬은 피에스 폴 리드의

Alive: The Story of the Andes Survivors를 기반으로 각본을 쓰고,

에단 호크를 주역으로, 존 말코비치의 나레이션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난도 파라도는 영화의 기술고문으로서 참가했다.

칼리토스 파에즈와 라몬 몬초 사벨라는 추락지점의 동체 부분을 방문했고,

영화의 촬영중에는 영화의 세트의 정교함이나 실제의 일에 대해서 배우에게 지시를 했다.


Alive: 20 Years Later

다큐멘터리 영화로, 감독, 각본은 질 푸에르턴 스미스, 나레이터는 마틴 쉰이었다.

 내용은 사고 20년후에 생존자들의 인생을 되짚는다.

또, Alive: The Miracle of the Andes에 참가한 생존자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Supervivientes de los Andes(1976)

멕시코 사람 프로듀서인 레네 카르도나 쥬니어의 제작으로 만들어졌다.

1973년 발행된 클레이 블라이어의 Survive!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LA ODISEA DE LOS ANDES는 1975년에 브라질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알바로 J. 코바세비치 감독, 마리오 발가스 료사 각본으로 만들어졌다.

 

 

 

사건의 흐름


10월12일 목

몬테비데오의 칼라스코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페어차일드 FH-227D가 아르헨티나의 도시 멘도사에 착륙.
승무원 5명. 승객 40명. 총 45명.

 

10월 13일 금

멘도사를 이륙 후, 안데스 산맥에 충돌, 추락.

충돌의 충격으로 후미는 동체에서 떨어져 분리되었고, 3명의 승객과 2명의 승무원이 기체 밖으로 튕겨나감.

9명이 즉사, 부상으로 인해 3명이 이 날에 사망.
사망 12명. 행방불명 5명. 생존 28명.

 

10월 15일 일

아돌포 피토 스토라우치가 금속조각으로 눈을 녹여 와인 병에 담기 시작.

난도 파라도는 의식을 회복하고 위독상태였던 동생 수산나를 간병.

정오 이후 3기의 항공기가 통과하는 것을 목격.

조금 늦게 온 1기는 기체의 지근거리를 통과, 날개를 흔들었고, 생존자들은 발견되었다 믿게 됨.

오후에 럭비팀의 리더(마르셀로 페레즈)는 지급할 식량의 일부를 누군가 먹은것을 발견.

 

10월 16일 월

로베르토 카넷사가 심한 상처를 입은 라파엘 에챠발렌을 위해 해먹을 만듬.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는 발에 시트 쿠션을 부착하여 설상화 대용이 가능함을 발견.

 

10월 17일 화

카를로스 파에즈, 누마 투카티, 로베르토 카넷사,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는 분리된 후미를 찾으려

추락지점에서 나와 반대편을 찾았으나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체력이 소진되어 귀환.

 

10월 21일 토

수산나 파라도가 사망.
사망 13명. 행방불명 5명. 생존 27명.

 

10월 22일 일

기체 내에서의 회의.

식물 및 그 외의 식료원이 없으므로 카넷사는

친구들의 유체를 식량으로 하여 생존을 계속할 것을 주장.

몇 명의 생존자가 먹을 것을 거부하나 카넷사는 이 일을 주도.

 

 

10월 23일 월

기체 안에서 발견한 라디오를 통해 탐색대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탐색을 중단한 것을 알게 됨.

누마 투카티, 다니엘 마스폰즈, 구스타브 세르비노는 눈 위에 남아있는, 기체가 미끄러진 흔적을 오름.

그 밤에 산 정상에서 1박을 함.

 

10월 24일 화
3명은 등산 도중에 잘린 날개 조각과 기체 밖으로 튕겨진 3명의 승객, 2명의 승무원,

 총 5명의 유체를 발견. 최종적으로 후미는 발견하지 못하고 3명은 기체로 돌아옴.

사망 18명. 생존 27명.

 

10월 29일 일
눈사태가 발생하여 기체를 덮쳐 기체 안에 있던 전원이 매몰.

비교적 얕게 매몰된 사람이나 눈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지만 8명이 사망.
사망 26명. 생존 19명.

 

 

10월 30일 월

눈보라로 기체 외부에 눈이 쌓여 좁은 기체에 갇힘.

누마 투카티의 생일.

 

 

10월 31일 화

카를로스 파에즈의 생일.

 

 

11월 1일 수

알프레도 판쵸 델가도의 생일.

바람이 멎고 하늘이 맑아져 생존자들은 기내의 재료로 제설도구를 만듦.

로베르토 보비 프랑소와즈와 코체 인시아테는 산을 100m정도 올랐으나 도중에 돌아옴.

수일 후, 누마 투카티와 호세 페드로 아르골타는 기체의 날개 부분까지 오름.

 

 

11월 5일 일

멤버 중 최종적인 구조를 요청하는 원정에 동행할 것인가 결정하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테스트.

카를로스 파에즈, 로이 할레,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은 2일간 원정으로 산 아래로 향함.

3명은 기체 후부 도어와 2개의 알미늄 용기와 1/3의 커피를 발견.

일몰까지 기체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음.

이후 비신틴이 파라도와 카넷사와 함께 원정을 하기로 결정.

 

 

11월 15일 수

아르톨로 노게이라가 부상의 염증으로 사망.

원정대는 기체를 나와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기상조건이 나빠 3시간만에 복귀.
사망 27명. 생존 18명.

 

 

11월 17일 금

난도 파라도, 로베르토 카넷사,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은 칠레를 향해 서쪽으로 이동.

이동중 분리된 기체의 꼬리와 흩어진 수트 케이스 발견. 후미에서 배터리를 발견.

 

 

11월 18일 토

원정대는 북서로 향하면서 산 정상에서 하룻밤을 보냄.

이 날 기체에서 라파엘 아챠발렌이 사망.

사망 28명. 생존 17명.

 

 

11월 19일 일

배터리의 무게로 인해 기체까지 옮기는 것을 포기.

기체에서 무전기를 꼬리로 가져 오기로 결정.

3명은 기체로 돌아와 수트케이스에서 발견한 것을 보여줌.

 

 

11월 23일 목

로베르토 보비 프랑소와즈의 생일.

로베르토 카넷사와 난도 파라도는 기체에서 무전기를 꺼냄.

 

 

11월 24일 금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 로베르토 카넷사, 난도 파라도 및 로이 할레이는 무전기 패널을 꼬리까지 운반.

로이 할레이는 무전기를 수리하기 시작.

도착하기 직전 그들은 전보다 많은 수트케이스가 노출된 것을 발견.

 

 

11월 25일 토

무전기에 배터리를 연결하려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

 

 

11월 26일 일

파라도와 빈틴신은 기체로 돌아감.

무전기 수리를 계속하기 위해 할레와 카넷사는 남음.

 

 

11월 28일 화

파라도와 빈틴신은 보다 많은 식량을 꼬리로 가져감.

생존자들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의해 우루과이 항공의 C-47이 그들의 탐색을 재개한 것을 알게 됨.

 

 

11월 29일 수

무전기의 발신기능을 회복하지 못한채로 기체로 돌아옴.

 

 

12월 9일 토

난도 파라도의 생일.

 

 

12월 11일 월

상공을 탐색기가 통과할때를 대비해 수트 케이스로 십자가를 만듬.

알프레도 판쵸 데갈도의 친구인 누마 투카티 사망.
사망 29명. 생존 16명.

 

 

12월 12일 화

로베르토 카넷사, 난도 파라도,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은 칠레로 향하는 계곡을 발견하기 위해 원정을 출발.

친구들이 만들어준 침낭을 이용하여 큰 바위 옆에서 잠.

 

 

12월 13일 수

카넷사는 골짜기와 계곡을 보고 그것이 도로라고 생각하나 침묵.

그룹은 등정을 계속하고 오후에 수면을 위한 바위에 도달.

카넷사는 도로에 대해 언급, 돌아갈 것을 주장하나 파라도는 다른 의견을 보였고,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잠.
기체의 비축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구스타보 세르비노와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는 사체를 탐색,

1체를 발견했으나 2명은 그것을 기체로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음.

 

 

12월 14일 목

비신틴과 파라도는 등산을 계속하고, 카넷사는 도로라고 생각한 지점을 관찰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음.

파라도는 산 정상에 도달했으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산맥.

카넷사와 파라도가 보다 멀리 원정을 할수 있도록 비신틴은 식량을 남기고 기체로 돌아감. 
기체에서 칼리토스 파에즈와 호세 페드로 알골타가 보다 많은 유체를 찾아 계곡을 오름.

1체 발견, 햇빛에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눈으로 사체를 덮음.

 

 

12월 15일 금

아침, 비신틴이 기체로 귀환. 카넷사와 파라도가 아직 칠레를 향해 원정중이라는 것을 설명.

아돌포 피토 스트라우치, 구스타보 세르비노, 호세 페드로 알골타가 전날 덮은 유체를 찾음.

다른 생존자들은 라디오를 통해 그들이 수트케이스를 사용하며 만든 십자가가 우루과이 공군 C-47에 발견된 것을 들음.

 

 

12월 16일 토

카넷사와 파라도는 3시간을 걸쳐 봉우리에 오르고, 그곳에서 가장 좋은 하산 루트를 탐색.

오후에 썰매로 긴 거리를 활강한 후 잠을 잠.

 

 

12월 17일 일

기체의 생존자들은 우루과이 공군 C-47에 의해 발견된

그들이 눈 위에 수트 케이스로 그린 십자가가 아르헨티나 기상학자가 그린 것이라고 공표한 것에 경악.

정오까지 파라도와 카넷사는 산 정상에서 결정한 루트대로 산 기슭에 도달해 계곡으로 나아가기 시작.

휴식할 때 그들은 가까운 시냇가에서 이끼가 자라는 것을 발견.

조난이래 처음으로 식물을 봄.

카넷사는 몇개의 약초를 먹음.

 

 

12월 18일 월

계곡 아래서 등정의 행보를 계속하던 중, 눈길은 끝남.

서쪽으로 향하는 개울을 따라 휴식을 취하며 걸음.

카넷사는 선글라스를 떨어트린 것을 깨닫고 일단 물러남.

선글라스를 발견 후 개울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

그 밤, 그들은 기체를 출발한 이래 처음으로 푹 잠.

 

 

12월 19일 화

아침, 원정대는 소 무리를 발견, 다음으로 빈 스프 캔과  쇠를 발견.

그 후 많은 소와 잘린 나무를 본 후 구출될 것을 확신하고 숙면.

 

 

 

12월 20일 수

침낭 등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걷기 시작했으나, 그 후 문명의 징후를 발견하지 못함.

카넷사가 구역질을 했으므로, 파라도는 그의 짐을 대신 짊.

자기 전, 카네사가 강 건너편에 있는 말에 탄 남성을 발견.

카넷사와 파라도는 자신들을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

출발 9일 경과.

 

 

12월 21일 목

기슭에서는 남성이 돌아와서 1장의 종이와 연필을 돌에 묶어 던짐.

 

'저는 산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왔습니다.

저는 우루과이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10일간 걸어왔습니다.

저는 그곳에 부상당한 친구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14명의 부상자들이 아직 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정말 적은 식량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아주 쇠약합니다.

당신은 언제 우리를 구해 주실건가요?

우리들은 걷는것도 힘듭니다. SOS' 라고 작성.

 

그 후 기체의 생존자들은 2명의 원정대가 무사히 발견, 구출되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게 됨.

 

 

 

 

신문에 보도된 카넷사와 파라도

 

 

 

12월 22일 금

 

그들은 아침을 먹고 많은 보도진과 만났으나 어떤 방법으로 생존해 왔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회피.

헬기는 동승한 파라도에 의해 인도되어 페어차일드기 추락지점까지 이동.

헬기의 추가 최대중량인 6명이 구조되었고, 남은 8명은 다시 하룻밤을 추락지점에서 보내게 됨.

서포트로서 의료반과 등산가가 함께 추락지점에 남음.
생존자들이 로스 마르티네즈 마을에 도착하고 몇시간후 전원이 성 페르난도의 세인트 존 병원에 수용됨.

 

 

 

 

카라스코 공항에서

 

 

12월 23일 토

 

오전 10시, 구조 헬기는 기체에 남은 8명의 생존자들을 위해 추락지점으로 돌아옴.

두번째 그룹은 칠레의 콜챠구아에 이송, 산티아고의 국민건강보험병원에 수용됨.

6명의 생존자들이 퇴원, 쉐라톤 호텔로 이동.

로이 할레, 하비에르 메톨, 코체 인시아테, 알바로 만히노는 병원에 잔류.

그날 밤 7시에 할레, 메톨, 인시아테, 만히노 이외의 생존자들은 쉐라톤 더 산 크리스토발에서 재회.

 

12월 24일 일

4명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쉐라톤 호텔에서 다른 모두와 합류.

로베르토 보비 프랑소와즈와 다니엘 페르난데스는 몬테비데오로 돌아감.

 

 

12월 26일 화

헤어짐. 파라도는 산티아고를 떠나 비나 델 마르의 집에 이동.

산티아고 신문 'El mercurio'의 1면 톱에 생존자들이 인육식의 기사를 발견.

생존자들은 몬테비데오에 돌아와 기자회견을 엶.

 

12월 28일 목

 

생존자들은 몬테비데오에 도착, 그들의 72일간의 생존의 시련에 대해 기자회견으로 설명.

또, 쇠약해진 로이 할레는 칠레에 남고 몇일후 집으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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