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소련군 야크 -9 전투기와 일본군 출신 북한 조종사들-WW2 Soviet Yakovlev YAK-9 Fighter & Japanese Army Air Service school North Korean Pilpts

슈트름게슈쯔 2013. 1. 6. 02:05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 YAK-9 전투기 생산공장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소 전쟁기간 동안  Yak-9 전투기는 소련에서 모두 14,579 기가 생산되었다.

 

 

 

우크라이나 흑해  세바스토폴 상공의  Yak-9D 전투기

 

 

 

 

상 페테르부르크 상공의 YAK-9  전투기

 

소련 공군의 YAK-9D 전투기는 무장으로 20mm ShVAK 기관포 1문에(포탄 120발 적재)

12.7mm UBS 중기관총 1정(실탄 200발 적재)이 장착되어 있었다.

최고시속은 672km/h 였으며 항속거리는 675km였다.

 

 



 

 

소련군의 YAK-9 전투기는 2차 세계대전 중반기얐던 1942년 10월

 독일 공군의 메서슈미트 BF-109와 포케 볼프 FW-109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했던 소련 공군의 대표적인 단엽 프로펠러 전투기였다.

2차 세계대전중 소련군이 가장 많이 생산했던 

YAK-9 전투기는 1942년부터 1948년까지 생산되었는데

여러가지 파생형을 합쳐 도합 16769대가 생산되었다. 

그러했던  YAK-9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표적인 소련제 지상무기들과 같이

대한민국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년후 북한 공산군이 소련에서 지원받은

그 무기들로 한반도 남한의 기습 남침시 사용했었던 원흉의 무기였다. 

또한 6.25 동란이 끝난지 2년뒤 였던

1955년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군의 두 조종사가

몰고온 항공기 또한 소련제 Yak 기 였다.

1955년 6월 21일 소련제 야크 기가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북한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 소속의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 두명이었는데 소련제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했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군 조종사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 - 1955년 6월 21일

 

 

평양출신이며 소련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운용 상위와 평남 강서군 출신이며

 중국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인선 소위 두명은 1955년 6월 21일 오전11시경 소속부대인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에서 무단으로 나와 야크18 연습기로 평양을 탈출하여

오후1시30분경 서울상공에 도달해 수차례 선회하며 귀순의사를 밝힌 후 여의도 비행활주로에 착륙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한의 신문지 및 연락서류를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초도라는 섬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날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기내에서 탈출을 상의해 그대로 남으로 방향을 틀어 인천을 경유해 여의도공항에 착륙한 것으로 밝혀졌다.

8월 16일 공군본부는 귀순한 이운용, 이인선 장교를 공군으로 정식 편입해 각각 대위와 소위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귀순 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정치와 사회 실상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이 타고 온 야크기의 성능을 직접 설명하는 시간도 가졌었다. 

이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각계 요인과 서울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귀순용사 환영식에서

서울시민증을 받고 부산에서 온 친지들과 극적인 상봉도 했었다.

 

 

 

 

 

대한민국 전 공군작전 사령관이었던 윤응렬씨 - 2009년

 

 

 

그리고 6.25동란이 일어난지 근 60여년이 지난후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조종사였던 윤응렬씨는 2009년

조갑제씨와의 대화에서

북한군의 6.25 남침 공격시 북한 공군의 YAK-9 전투기 조종사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군 항공대 출신 조종사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6.25 동란 당시 대한민국 공군이 합천 해인사를 폭격할뻔 했었던 

일에 대한 역사적 의문점의 진상을 말해 주었다.  

윤응렬씨와의 대화를 기초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실과 일제강점기 친일파였던 인물의 등용에 대한 북한 정권의

그 발탁 기준에 대하여 조갑제씨가 국민들에게 알려준 글은 다음과 같았다.

 

 

 

 

 6.25 동란 당시를 회고하며 조갑제 씨에게 증언하는 윤응렬 씨

 

 

尹應烈 장군 증언: "日軍출신 조종사들이 북한공군 창설에 대거 참여"

"6·25 때 한국 공습한 야크기 조종사들은 거의가 일군 조종사 출신들"

趙甲濟

 

   

 1951년 6·25 전쟁 때 미군이 한국 공군에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李承晩 대통령은 불복한 한국군 장교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張志良(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내용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 사람은

張 총장의 후배이기도 한 尹應烈(윤응렬) 전 공군작전사령관이다.

그의 이런 노력은 공군으로 하여금 미군과 李承晩 대통령이 해인사 폭격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폭격 요청은 경찰이 한 것이며, 金英煥(김영환) 편대장이

스스로 폭격 회피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확인하도록 하였다. 
 
 2009년 82세였던 尹 장군은 일본군, 북한군, 한국 공군에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日帝 시대인 1943년 평양3中 재학중 일본의 소년항공병학교에 들어가서

조종훈련을 받고 이듬해 자바 戰線에 배치되었다.

소년항공병학교 제15기 졸업생인데, 수십 명의 한국인이 동기생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해방 뒤에 북한과 한국 공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尹應烈씨는 1945년 8·15 해방을 프놈펜에서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북한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李活(이활).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自費를 들여

조종술을 배운 뒤 일본 해군에 촉탁신분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았다.

 소년항공병학교 출신으로는 이흥부, 박경옥씨 등이 참여하였다.

나중에 인민군 9사단장으로 가는 허민국은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공군사단장까지 오른 서주필은 윤흥렬씨의 항공병학교 동기생인데,

6.25 전쟁 때 美軍 B-29기도 격추시킨 사람이었다.
 
 尹應烈씨는 북한공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상검열을 받아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하자 월남하여

1948년에 육사 7기로 들어갔다. 그는 졸업 후 육군 항공대 소위로 임관하였다가

19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6.25 전쟁중 107회의 출격을 기록하였다

 

6·25 남침 당일 尹씨는 여의도 비행장의 당직사관이었다.

그날 소련제 야크기를 몰고 서울 등지를 폭격한 북한 공군조종사들은 거의가 일본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윤씨의 동기생인 박경옥은 야크기가 격추되면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가 사살되었다.

또 다른 동기생인 이흥부는 낙하산을 타고 着地(착지)하였으나 복부에 총상을 당하였다.

한국 공군이 그를 인수하자 李씨는 동기생인 윤응렬씨를 찾다가 숨졌다고 한다.
 
 인천 상륙 이후 국군이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윤응렬씨는 평양에 가서 이흥부의 부모를 만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차마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왔다고 한다. 
 
 

위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도 日帝시대의 군대 경험자를

소중한 자원으로 생각하여 重用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親北세력이 대한민국을 만든 主流세력을 공격하기 위하여

박정희 같은 滿軍장교들까지 親日派로 몰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한때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인데,

일제 시대에 일본군의 보조원으로 근무했던 이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日帝下 도의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삼촌이다.

이승만이 짠 대한민국 초대 내각엔 친일파가 한 사람도 없었으나

김일성의 初期 정권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금강산에서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을 때 북한의 한 고위간부가

私席에서 한국측 모 인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남한에서 친일파를 새삼 거론하던데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김일성 주석님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뉘우치면 다 받아들여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산당에 협조한 친일파는 重用하고 반대한 친일파는 숙청하였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철부지 친북파들은 북한정권이 친일파를 숙청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하지 못하였으므로

 북한정권이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무식한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25 남침 직후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은 한국 공군의 창설 멤버인

李英茂 대령(육군항공대장 역임. 당시 민간인)을 납치하여 갔다.

 그는 장개석의 중국군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이다.

李 대령을 납치해간 북한군은 협력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李씨가 거부하자

 그를 투옥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협조적인 친일파를 重用하고 반대하는 독립파를 탄압한 셈이다.

이게 북한정권의 친일파 숙청 기준이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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